이번 선거는 역대 대통령 선거 가운데 주요 후보 나이 차가 가장 많이 나는 대선이다. 이전까지 가장 많은 나이차를 기록했던 2002년 제16대 대선 때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나이차는 15세였는데 이번 대선은 무려 34세 차이가 난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74세고 이준석 개혁신당 대통령 후보가 40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61세다.
20대 한복판이던 25세 때 유행가는 김 후보의 경우 송창식의 '고래사냥'이었고 이재명 후보의 경우 이상은의 '담다디'였다. 이준석 후보가 25세 때 유행했던 노래는 소녀시대 'Gee'였다. 1인당 GDP는 김 후보 때 618달러, 이재명 후보 때 4749달러, 이준석 후보 때 1만9천144달러였다.
서로 까마득하게 먼 이들의 20대 시절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51년생인 김 후보는 1971년부터 1981년까지 20대를 보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전두환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시기였다.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했다.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인용 컴퓨터 제조업체 애플을 설립한 게 김 후보가 스물다섯 때 일이다. 에버랜드 전신인 용인자연농원도 이때 처음 개장했다. 영화배우 조진웅이 이때 태어났다.
김 후보가 20대 시절 거리에선 양희은의 '가난한 마음', 장욱조의 '고목나무', 서유석의 '가는 세월',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 같은 곡이 흘러 나왔다. 영화관엔 '비련의 벙어리 삼룡' '바보들의 행진' '걷지 말고 뛰어라' '내가 버린 남자' 등이 걸렸다.

이재명 후보가 20대를 보낸 시기는 1984년부터 1994년까지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전국을 휩쓰는 운동권의 민주화 광풍과 개헌, 올림픽과 국외여행 전면 자유화가 이뤄졌다.
이재명 후보가 25살이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운동권의 낙원' 소련도 무너져 내렸다. 중국에선 천안문 사태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진격의 한화' 연고지인 대전이 대덕군을 흡수해 '대전직할시'가 된 시기도 이때다. 이전까지 불법이던 과외가 합법화 됐고 주가가 처음 1천 포인트를 돌파했다. 임수경 전 민주통합당 의원이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이재명 후보가 20대를 보내던 시절 술집에선 김수철의 '못 다 핀 꽃 한 송이', 나미의 '빙글빙글, 장덕의 '님 떠난 후', 변집섭의 '희망사항',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가 흘러 나왔다. 영화배우 김부선 주연작 '여자는 남자를 쏘았다' '애마부인 3'가 인기를 끌었고 '뽕' '잃어버린 너' 등이 영화관에 걸렸다.

이준석 후보가 20대를 보낸 시기는 2005년부터 2015년까지다. 세상을 바꾼 '스마트폰'이 등장했다. 김 후보가 25세 때 태어난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은 때가 2007년이다. 이때 한미 FTA가 타결됐고 이후 수많은 인파가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뚫린다"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위기로 전세계가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이 드디어 원정 첫 16강을 진출하며 축구 후진국 딱지를 뗐다. 한국 인구가 5천만을 돌파한 게 2012년의 일이다.
한류가 시작된 시기였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고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올랐으며 아이돌 '빅뱅'이 전성기를 보내기 시작했다. 1천만 관객 동원 영화가 본격 등장하던 시기였다.
2005년 '왕의 남자', 2006년 '괴물'이 연이어 1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한국 영화 최초 1천만 관객 동원 영화인 '실미도'가 2003년에 개봉했고 이듬해엔 '태극기 휘날리며'가 1천만 관객을 동원해 2006년까지 해마다 줄지어 1천만 관객 동원 영화가 배출된 시기가 이때였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당선 뒤 유죄면 직무정지? 헌법학자 10인 대답은
홍준표 "30년 전 노무현 따라 꼬마 민주당 갔다면"…작심 토로
김문수 "尹계엄권 발동 부적절…진심으로 사과"
"이준석 싫어요" 67%…비호감 대선후보 1위
'이재명 정부 홍준표 국무총리설' 제기…李·洪은 "사실 무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