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준(67·가명) 씨는 3월이 가장 싫다. 3월은 그가 태어난 달이었다. 침대 옆 달력은 2010년 3월에 머물러 있다. 달력에는 검은 볼펜으로 쓴 몇 줄의 기록이 남아 있다. '19일 가족여행, 강릉' '20일 집 도착'. 두 딸과 함께 떠난 첫 가족여행이었다. 사흘 뒤인 23일. 이날은 새까만 볼펜으로 덧칠이 돼있다.
그날 밤 10시가 조금 넘어서,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를 마친 큰 딸 지애의 전화가 왔다.
"아빠, 나 지금 집에 가. 우리 소주 한 잔 할까?"
"좋지. 맛있는 거 해놓을게."
기준 씨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갔다. 그는 자신을 부족한 아빠라 여겼지만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아내가 떠난 뒤에도 두 딸과 함께 버텼다. 스무 살을 넘기며 지애도 못난 아빠의 궁색함과 서툶을 조금씩 이해해주는 듯했다. 가족여행을 먼저 제안한 것도 지애였다. 지금 같은 날이 계속되기를, 기준 씨는 바랐다.
밤 11시 20분. 현관문 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기준 씨는 맨발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지애는 쓰러진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흔들어도 대답이 없었다. 바닥에 고인 피를 본 뒤에야 그는 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해자는 지애의 전 남자친구였다. 그는 범행 후 몇 층 위로 올라가 흉기들이 담긴 가방과 함께 투신했다. 이날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기준 씨는 요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벌건 대낮인데도 방 안은 어둑하다. 창문은 검은 시트지가 발려 있거나, 옷가지로 가려져 있었다. 햇볕은 겨우 가장자리를 타고 스며들어 희미하게 방 안을 밝혔다. '내가 햇빛을 볼 자격이 있을까.' 눈을 뜨자마자 자책이 밀려오고, 곧 우울감이 전신을 감싼다. 기준 씨의 하루는 언제나 이렇게 시작된다.
1996년 이혼한 뒤 IMF 여파로 빚더미에 앉으며 결국 비둘기아파트로 이주했다. 당시 아이들은 7살, 3살이었다. 막막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곁에서 살피는 건 사치였다. 여자애들이 첫 생리를 언제 하는지조차 몰랐다.
두 딸은 사춘기 이후 가출과 탈선을 반복했다. 어느 날 딸들의 방을 청소하던 중 다이어리 내용을 봤다. "첫 번째 소원,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 두 번째 소원, 오늘 죽었으면 좋겠다." 기준 씨는 화를 내지 않았다. "화낼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애들이 가출하면 온 동네를 뒤집어가며 찾아다녔다. 잡아도 크게 혼낸 적은 없었다. 대신 언제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거짓말만 하지 마." 그것이 두 딸에게 유일하게 요구한 것이었다.
큰 딸이 교제살인으로 세상을 떠나자, 기준 씨는 빠르게 무너졌다. 작은 딸은 언니가 죽은 집에서 살기 힘들다며 독립했다. 이때부터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취하면 집에서 울거나,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렇게 10년을 보냈다. 지금 기준 씨는 뇌경색 후유증과 뇌동맥류, 우울증을 앓고 있다.
가끔 안부 정도 확인하던 작은 딸은 지난해 결혼 뒤 발길이 끊겼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까봐 기준 씨도 연락하지 않았다. "효도를 바라는 것도 웃긴 일이죠." 다만 결혼식을 앞두고 작은 딸의 손에 천만원을 쥐여 줬다. 빚을 내 마련한 돈이었다. 그는 지금도 수급비를 쪼개 그 빚을 갚는 중이다.
행복한 사람은 불행을 떠올리지 않지만, 불행한 사람은 늘 행복했던 순간을 곱씹으며 살아간다. 기준 씨는 15년 전 강릉 가족여행을 자주 떠올린다. 이 생각은 늘 자책으로 끝난다. "이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빠 노릇을 제대로 했었다면…."
"내 존재를 세상에서 지우고 싶어요." 기준 씨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단골 슈퍼마켓에서 포인트 적립을 위해 이름을 물으면 "장"이라고만 대답한다. 점원이 이름을 재차 물으면 그냥 나가버린다. 그는 자신의 이름도, 나이도 싫다고 했다.
이 아파트에 오래 살며 이웃의 죽음도 여러 번 목격했다. 눈인사만 하던 이웃 할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가 "사는 게 재미가 없다"며 기준 씨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며칠 뒤에 아파트에서 떨어져서 돌아가시더라고…. 딸과 크게 다퉜다고 들었어요." 기준 씨도 가끔 창밖을 보면서 자신이 떨어지는 상상을 반복한다. 그는 '내가 즐겁자고 상대를 슬프게 하면 안 된다'는 오랜 좌우명을 붙들며 살아왔다. 고립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그가 몇 번의 3월을 더 견딜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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