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제12회 매일여성생활수기 우수작-김옥년

새벽 1시30분.오늘도 지친 몸으로, 그러나 마음만은 한없이 편안하게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선다.

이 장사를 시작한지 올해로 6년째. 처음 시작할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모든 것이 너무나 많이 변했다. 노력하는 삶에는 절망이 없음을 이제야 실감하게된다.

부산에서 어장과 공장을 경영하시던 부모님 밑에서 유복하게 자라 고생이라고는 몰랐던 내가 남편 한사람만을 믿고 시집온 것이 벌써 33년전이다. 일찍이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2남1녀중 막내로 자란 남편은 가진게 아무것도 없었다.

말단순경이었던 남편을 따라 낯선 타향을 옮겨 다니며 외롭고 힘들어 참 눈물도 많이 흘린 신혼시절을 보내고 남편이 대구로 전근을 오면서 살림도 어느정도 여유가 생겨 이제 고생도 끝이구나 싶던, 결혼 12년째 되던 그해, 뜻하지않은 일로 남편이 퇴직을 하게됐다.

궁리끝에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과 퇴직금을 합해 집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경험이 전혀 없었던 우리는 빚만 진채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다. 빚을 떠안은채남편과 나는 다시 동인동에서 작은 식당을 열었다. 공사장 인부들 새참도 해나르며 아둥바둥했지만 생각만큼 벌이가 쉽지 않았다.

손바닥만한 식당에 부부가 둘 다 매달려 있을순 없는 일이어서 남편은 식당손님의 소개를 받아 책외판원으로 나섰다. 한때 경찰서 수사계 형사였던 남편이 양어깨에 그림책을 잔뜩 짊어지고 집집마다 기웃거리며 문전박대 당하는 일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아직 어린 네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마다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방으로 책외판을 다니느라 집에 없는 남편대신 국민학교 5학년이던 아들아이가 제몸의 두배나 되는 짐자전거를 끌고 새벽장보기를 도운뒤 학교에 가는등 그럭저럭 식당을 꾸려갔으나 집장사때의 빚때문에 할 수 없이 식당을 내놓아야 했다.

남편의 판매실적은 별로였고 몇권 판것도 수금을 해야 돈을 받을 수가 있어벌이가 신통치 않아 생계가 막막했던 나는 친척의 소개로 시장에서 생선장사를시작했다.

큰 고무통에 판자 하나를 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쪼그리고 앉아 한겨울 추위속에 떨고 있자면 창피한 생각과 함께 울컥 눈물이 솟구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돌덩이보다 더 꽁꽁 언 생선들을빨갛게 언 손으로 떼어내고단속반에 쫓겨 이리저리 도망다니다보면 한마리라도 더 팔아야한다는 오기가생겼다.

저녁에 장사를 마치고 손도 제대로 못씻은채 버스에 오르면 차안 가득 진동하는 비린내에 사람들이 인상을 찡그리고 싫은 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모른척창밖만 내다보며 1시간을 넘게 버텨야했다.

버스에서 내려 그날 번 돈으로 집앞 쌀가게에서 쌀한봉지를 사면 그게 지방에간 남편을 뺀 우리 다섯식구 하루 양식이었다. 쌀 살 돈이 없어 수제비로 끼니를 때우는 날도 많았던 그시절 아이들 도시락반찬거리 살 돈이 없어 밀가루반죽 찐 것을 썰어 간장, 고춧가루에 무쳐 도시락을 싸는 날이 대부분이었고어떤 날은 팔고 남은 생선을 구워 넣어주기도 했다.

생선통을 이고 여기저기 도망다니면서도 꾸준히 단골을 만들어간 덕에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 좀 무리를 해서 변두리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했다. 그러나 꿈만같은 새집생활에 만족하고 있을 형편이 아직은 아니었다.남편은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책장사를 다녔지만 벌이가 썩 나아지지도 않았고 아직갚아야 할 빚도 많았다.한참 공부하는 아이들을 내팽개친채계속 장사를 다닐 수 없는 노릇이어서 궁리끝에 하숙을 치기로 하고 경북대 뒤연립주택 한채를 세얻어 들어갔다.

집뒤 텃밭을 일궈 찬거리를 가꾸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잘해주려고 애쓰며 기대를 갖고 시작한 그 일도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반찬가짓수에서 난방문제까지 하숙생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기 힘들었고 사소한 일에도 이집저집 좋은 조건을 찾아 옮겨버리는 하숙생들을 감당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급기야 한하숙생과 심한 다툼까지 하고난 후엔 하숙을 그만두었다.

세를 주었던 아파트에 다시 들어갈 여유가 없어 우리 여섯식구는 단칸셋방으로 이사하고 나는 아는 사람 소개로 전국을 다니며 옷감장사, 약장사의 수금일을 했다. 시골마을로 다니며 수금하러간 집에서 쫓겨난 적도 있고, 맞을뻔하기도 했으며, 한겨울에 찬바람 몰아치는 산길을 몇시간씩 걸어다닌 일은 생각만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무진 고생을 하며 책장사를 다녔던 남편은 결국 수금이 제대로 되지않아 빚만 진채 일을 그만두었다. 살림이 더 어려워진 우리식구는 애들 큰집이 있는시골로 이사를 했다.

시숙이 동네뒤 산아래 축사에서 돼지를 키우고 계셨는데 돼지가 새끼를 낳을때면 며칠씩 머무르고 있는 축사옆 두칸짜리 방 중 하나를 빌렸다. 낡을대로낡아 금방이라도 쓰러질것 같은 집인데다 고지대라 물이 제대로 나오질 않아아래집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먹어야하는 불편함과 집 바로 옆의 돼지우리에서나는 냄새까지, 불편함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집세에 쪼들리지 않아도 됐기에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수금일이 끝나 할일이없어진 나는 거제도에서 불고기집을 하는 친척언니로부터 일손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거제도로 갔다. 낯선곳에서 식당홀에서새우잠을 자야했고 두고온 식구들 걱정도 됐지만 친척언니가 잘해주어 큰 어려움은 없었다. 책장사할때 다못한수금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을까해서 가끔씩지방으로 수금다니던 남편, 고등학교 졸업후 취업전선에 뛰어든 큰딸, 학비때문에 대학1년을 마치고 군대간 큰아들, 부쩍 심해진 남편의 술주정을 못견뎌하며 돈벌러간다고 집나간작은아들, 집에 남아 고등학교를 다니는 작은딸··.이렇게 우리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했다.

방학때 나를 보러 거제도에 내려온 딸들을 보며 힘들더라도 가족곁에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에 대구로 올라온 나는 룸살롱 주방에서 일하게 됐다. 내몸하나도 제대로 돌릴 수 없을만큼 좁은 주방에 난방장치가 있을리 없고 벽으로 새들어오는 찬바람에 얼어붙은 손을 프로판가스불에 녹이며 안주를 만들고 쉴새없이 들어오는 그릇들을 씻어냈다.그 당시는 심야영업을 하던 때라 새벽4시 영업이 끝나 청소를 하고나면 다섯시였다.

첫차를 타면 집으로 갈 수 있었지만 1시간이 넘게 버스를 타고 가 잠깐 눈을붙이고 이내 와서 저녁장사 장을 봐야했다. 옆집 숟가락 숫자까지 안다는 작은시골동네에서 여자가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곱게 보일리가 없어서 1주일에 한번만 집에 가기로 하고 호스티스 아가씨들 대기실로 쓰던 계단아래 작은 골방에서 생활을 했다.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종아리가 퉁퉁 붓도록 서서 일을 하는 것도, 추위에 떠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새벽영업이 끝나고 술에 취한남자종업원이 나를 얕보고 희롱을 하는 일이었다. 아들뻘밖에 안되는 어린것들에게 받는 수모는 참기 힘들었지만 내 한몸 고생으로 자식들 공부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참고 또 참았다.

그무렵 남편은 술로 세월을 보냈다. 경찰퇴직이후 잇따른 실패로 좌절하고있던 남편은 책장사를 하며 한여름엔 온몸에 땀띠가 없어질 날이 없었고, 뼈가앙상하게 마르도록 고생하고서도 빚만 지게되자 술을 마시기 시작해 거의 매일술을 마셨다. 전에도 술취하면 식구들을 잠못자게 하는 등 주정이 심한 편이었는데 이젠 더 심해져 점점 포악해져갔다.

1주일에 한번 손님들이 먹다남긴 안주를 싸들고 새벽 첫차를 타고 집에 가면대문앞에서 학교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딸애를 만날 수 있었다. 1주일만에 보는 딸애지만 단몇분 얼굴 보는게 고작이었다. 딸애는 아침에 눈떴을때 옆에엄마가 있는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해 큰딸이 시집을 갔다. 제가 번 돈으로 옹색한 살림을 장만하고 축사옆초라한 방에서 함을 받는, 고생만 하다 시집가는 딸의 얼굴을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참으로 가난이 원수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가난이 한이 되는 일이 생겼다.

큰딸이 시집간 몇달후 고3이던 작은딸이 자신이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그러나 남들처럼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등록금을 낼 돈이 없었다. 여기저기 돈을 구하러 뛰어다녔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돈 빌릴 곳을 찾았지만 빚더미위에 올라앉아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우리에게 누가 돈을빌려주겠는가.

집안형편을 누구보다 잘아는 딸은 학자금융자서류를 꾸며와 내밀었다. 보증인만 있으면 돈없이도 등록할 수 있다는 말에 이제 살았구나 했지만 그건 내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누구도 보증을 서주지 않았다. 보증을 서줄만한 사람은 마침 멀리 가 있는중이었고 다른사람들은 모두 외면했다. 결국 등록마감시간까지 아무것도 하지를 못했다. 며칠을 울어 눈이 퉁퉁 부은 딸을 보며 아무말도 해줄 수 없는 에미마음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가난해도 자식들 공부만은 제대로 시키려고 그 모진 고생을 참았는데 그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가다니…. 가난이 원수란걸 정말 뼈저리게 느낀 내 평생 잊지못할 날이었다.룸살롱에서 1년정도 일한후 나는 신암동의 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까지의 고생에 대한 보상이었는지 그곳에서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남의가게였지만 내 가게처럼 정말 열심히 일했다. 주인도 나를 가족처럼 대해주었고 월급도 자주 올려주어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은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큰아들이 제대하면서 신암동에 방2개를 얻어 이사한 나는 일하던 회관앞에서포장마차를 시작했다. 남편과 아들이 일을 도왔고 회관종업원들과 주인도 도움을 많이 주어 장사가 잘됐다. 비록 포장마차지만 내가 주인이라 생각하니 고생스러워도 신이 났다.

하지만 포장마차 일은 생각만큼 쉽지않았다. 밤새도록 화덕의 연탄가스를 마시며 추위에 꽁꽁 언 발을 동동거려야 했다. 노점상단속이 한참 심했던 때라하룻밤에도 몇번씩 리어카를 끌고 쫓겨다녀야 했고 술취한 사람들의 싸움도 끊이지않았다. 칼부림을 하느라 포장이 찢긴 때도 많았고 일을 돕던 큰아들이 칼에 맞아 죽을뻔한 일도 있었다.

밤잠 못자고 온식구가 매달려 장사를 한 덕에 새집사서 1년밖에 못살아본 우리 아파트에 무려 7년만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낡은 집이 됐지만 여섯식구가 단칸방을 전전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대궐과도 같은 집이었다.남편과 나는 포장마차를 하는 길 안쪽 골목에 창고로 쓰는 작은 점포를 하나얻어서 숙식을 하며 포장마차장사를 계속했다. 시멘트 바닥위에 평상을 만들어스티로폴을 깔고 잠을 잤고 화장실이 없어 요강에 용변을 봐야했다. 발아래 쥐가 왔다갔다 하고 주변 술집에서 나온 취객들이 내놓은 악취에 시달렸지만 하루하루 느는 매상에 힘든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골목안 시장에 가게가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술과 닭똥집안주를 파는 작은 가게인데 주인이 몸이 안좋아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어렵게 돈을 마련해 가게를 인수했다. 낡고 허름했지만 온식구가 그 작은 가게에 매달려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닭똥집 껍데기를 까느라 손톱이 다 문드러지고하루종일 튀김을 하고 나면오른팔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지만 아침부터 새벽까지 힘든줄 모르고 일했다.튀김기름이 늘어붙어 벽이며 천장이며 바닥이 모두 끈적끈적하고 두사람 누우면 꼭 끼는 가게 평상에서 남편과 나는 숙식을 하며 장사를 했다.얼마안가 단골손님이 꾸준히 늘고 매상도 불어 1년후엔 차도 한대 살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던 새우잠을 안자고 집에서편안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앉을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장사가 잘되던 어느날,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일이 생겼다. 저녁무렵, 한창 바쁜데 석유버너의 불이 꺼져버렸다. 남편이 후다닥거리며 버너를 손보는데 호스가 빠져버려 온몸에 석유를뒤집어쓴 상태에서 버너를 고치고 불을 붙이려 라이터불을 켜는 순간 남편 몸에 불이 붙어버린 것이다. 온몸에 불이 붙어 가게바닥을 뒹구는 남편은 사람이아니라 불덩이였다. 전신에 3도화상을 입은 남편은 응급실에서 썩어들어가는피부를 긁어내는 치료를 받으며 숨도 못쉴만큼 고통스러워했다.다음날 피부이식수술을 위해 수술실로 들어간 남편은 예정시간이 지나도 나오지를 않았다. 몇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수술실을 나온 남편은 이식할허벅지부분 피부만 떼어낸채 이식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출혈이 너무 심해 도저히 수술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다음날 출혈이 좀 멎은후 병실에서 이식수술을 했다. 수술 다음날부터 남편은 이상해졌다. 헛소리를 하고 몸을 뒤틀며 자꾸만 수술부위를떼내려고 했다. 처음엔 엄살이거나 치료할때의 고통이 너무 심해 그러려니 했다.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한밤중에 병원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고 내가 자기를 죽이려한다고 욕을 하고 헛것을 자꾸 보는 것이 영락없이 실성한 사람이었다. 손발을 침대에 묶어두었지만 그걸 다 풀어버리고 수술한 부위도 자기손으로 떼어내 버렸다.

부랴부랴 달려온 담당의사는 "아저씨 평소에 술 많이 드셨죠?"라고 물었다.그렇다고 했더니 이미 알콜중독이 돼있는 상태에서 입원후 술을 못마시니 금단현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며칠을 더 지켜보다 나아지지 않으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자면서 피부이식수술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했다.

다음날 재수술을 위한검사를 했다. 첫번째 수술후 간이 많이 나빠져 있어다시 전신마취를 할 수는 없고 통증이 있더라도 부분마취를 하고 병실에서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다. 이젠 더이상 떼어낼 피부도 없는 남편 몸의 빈자리를찾아 피부를 떼내고 이식한후 극심한 통증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남편을 잡고있는건 내게도 큰 고통이었다.

온 몸을 붕대로 감은채 남편은 꼼짝도못하고 누운채로 대소변을 받아내고세수를 하고 밥을 먹어야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금단현상이 점점 없어져간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가게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막내아들과 내가가게를 꾸려나가고 직장에 다니던 작은딸이 사표를 내고 남편의 병구완을 했지만 내가 하루라도 안가면 남편이부쩍 짜증을 내 매일 새벽1시에 가게문을 닫고 병실로 가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가게로 가서 장사를 하는 생활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 병원에는 보호자용 침대가 없어 시멘트바닥에 자리를 깔고 웅크려 자고나면 온몸이 쑤셔팔하나도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피부이식환자는 육류와 영양가많은 음식을 먹어야 빨리 피부가 살아난다는 의사의 당부에 매일 음식을 해가야 했다. 다른 환자들과 달리 차도가 없어 짜증이 늘어가는 남편때문에라도 매일 병원에 가는 일을 거를 수가 없었다.

다른 환자들보다 더디긴했지만그래도 남편은 많이 회복되어 한달반만에 퇴원을 했고 얼마후 작은딸 결혼식에선 큰사위의 부축을 받으며 딸의 손을 잡아줄 수가 있었다.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그때의 사고였지만 새옹지마라 했던가, 그 일로 우리가정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매일이다시피 계속된 남편의 술주정에 우리 식구들은 참 많이도 시달렸었는데 퇴원후 남편은 의사의 엄명에 술은 전혀 입에도대지 않고 불편한 몸이지만 가게일을 더 열심히 도와주었다.불이 나면 더 잘산다는 말이 정말인지 가게도 이전보다 더 잘돼 넓은 새 아파트로 이사도 했고 일하는 사람을 더 들여 내몸도 돌보며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쉬는 날이면화상으로 오그라든 손가락이지만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교외로 놀러도 다니는 여유를 가지게 됐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목이 메일만큼 힘들고 고달픈 생활이었지만 각자의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식들을 보면 마음은 늘 뿌듯하고 행복해진다.내년이면 우리부부는 함께 환갑을 맞는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동안은 생각도 못했던 여행이라도 가서 이제는 옛일을 웃으며 얘기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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