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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론-광복 50돌에…

벌써 광복 50주년이 되었다. 그동안 일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초기의 원색적인 반일에서 이제는 제법 진지한 극일의 논의로까지 진전되었다. 그러한논의중 어떤 것은 본질적인 성찰이 바탕해 있고 어떤 것은 미래지향적인 안목으로 전개되고 있어 우리 의식의 그만한 성숙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논의의 더 많은 부분은 여전히 표피적인 감정싸움에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일본의 역사왜곡및 부당한 표기, 망언등으로표현되는 과거사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언론은 통분의 표현을 숨기지 않고 사회도 벌집을 쑤셔놓은듯 들끓는다. 그들에게 당한35년의 치욕에 비추어 보면 당연하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그렇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그러한 우리의 반응은 본질과는 무관할 뿐더러 지극히 과거지향적인 감정소모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각 민족은 저마다의 역사를 가지며, 어떤 역사를 구성하느냐는 그들만의 권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진실의 기록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한 민족의 역사에는 그 민족의 주관적인 감정이 스며들기 마련이다. 어떤 민족도 후손에게 자신들의 악행을 정직하게 기록해 전하려고 하지않는다. 특히 집단적인 악에 대해 더욱 그러한데, 어떤 면에서 그것도 일종의 자기방어권일 수 있다.

우리 역사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의 어떤 국사교과서도 고구려의 요동점령에 대해 침략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고구려의 국경확대, 요동진출이대부분이고 기껏해야 점령이라는 말을 쓸뿐이다. 거기 대해 중국정부가 항의를 해온다면 어떤 기분일까.

임진왜란이란 용어도 그렇다. 왜란 일본의 정식 명칭이라기보다는 일종의비하시킨 명칭이다. 거기다가 난이란 말도 작은 것이 큰것에 거스른다는 뜻이 있어 동등한 국가간의 전쟁을 가리키는 말로는 적합하지 않다. 개관성있는 임진왜란의 명칭은 '임진조일전쟁' 혹은 '조일7년전쟁'쯤이 될 것이다.이순신장군을 일본의 자객이 암살했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를 일본의지사 혹은 애국투사라고 불러주었을까. 아마는 잘해야 일본의 자객이었을 것이고, 초등교과서쯤에는 틀림없이 '간악한 일본 암살자'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본의 반도진출이나 '평화적 정권접수'라는 교과서 표현에 사회 전체가 술렁거린다. 안중근의사를 불령선인 혹은 암살자라고 한데대해 분노하고 항의한다.

물론 천년전의 고대사와 고작 백년도 안되는 근대사를 대하는 데는 감정의차이가 있을 수 있다. 임진왜란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한 당연한 용어상의 권리이며, 이등문은 이순신과 같은 자기 조국수호의 성웅이 아니라이웃 침략의 원흉이므로 다르게 취급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논리도 얼마든지 성립한다. 세월은 역사의 본질을 바꿔놓을 수없다. 주관성이 민족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고 '방어적 공격'이란 말이 성립될 수 있다면 그걸로 침략과 수호는 혼동될 수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프게 깨달아야 할 것은 그같은 우리의 감정적인 대응이 한때의 외부적인 발산으로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그같은 감정을 내부적인 힘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위하고 항의하느니보다는 두번 다시 그런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내면의 다짐과그 다짐을 뒷받침하는 노력이 조용하나 치열하게 전개되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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