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국을 통해 수입된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의 나라를 만들고자했던 북학파(북학파)들에겐 요즘식으로 말해 과학영농의 실현 또한 중요한과제였다.북학파의 막내 풍석(풍석) 서유구(서유구.1764~1845)는 우리나라서는 처음으로 서양의 과학적인 영농기술과 농업경영을 도입, 종래의 농서를 집대성한'임원경제지'(임원경제지)를 남김으로써 조선시대 최고의 농학자로 평가된다.
'농사직설' '산림경제' '택리지' '고사촬요' '고사선서' '과농소초' '중보산림경제'로 이어지는 종래의 조선농학의 체계위에 청나라의 새로운 농학등8백여종의 자료를 참고로 하여 펴낸 '임원경제지'는 1백13권 52책의 방대한저술로 종래의 종합 농서와 마찬가지로 밭갈고 씨뿌리는 농사짓기에서부터농촌의 취미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수록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획기적인 것은 농사짓기의 개선, 농기구의 개량, 농작물의 품종개량, 수익성과시장성을 염두에 둔 농업경영을 강조한 부분이다.
서유구는 먼저 종래의우리나라 농학이 농사시기를 말하면서 지역차를 배려하고 있지 않는 것은 큰 결함이라고 지적, 위도에 따른 농사시기의 조절을제의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지세가 남북으로 길어 장백산에 서리가 내릴때 지리산 양지쪽은 벌레가 활동하고, 제주도서는 감귤이 익고 있는 점을 들어 서울을 기준으로 농시를 일률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 이의 개선을위해 지금의 기상대 역할을 담당하던 서운관(서운관)의 관리를 8도에 파견,각 지역의 위도를 실측해 새로운 농산역을 만들것을 구상했다.농작물의 품종개량은 수확량의 증가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홍수와 가뭄대비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 기장.피. 마.맥.콩등 주요작물의 불합리한 잡종법을 개량해 품종개량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농기구도자기풍토에 맞는 것을 사용해야 한다며 쟁기등 농구가 중국의 것과 우리의것이 어떻게 다르고 달라야 하는가를 농서에 도표를 그려가며 소상히 설명했다.
이와함께 그는 일정한 규격의 농구가 있어야만 노농력 절감과 경종법의 개량이 실효를 거둘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이전까지의 농서에서는 볼 수없었던 근대적인 시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이 오늘날의 시점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농업의수익성과 시장성을 농업경영의 주요문제로 제기한 것이었다.물론 수익성과 시장성을 고려한 작물재배는 담배, 소채류재배권장등 전시대 몇몇 실학자들이 제기했지만 서유구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명쾌한 이론으로 체계화했다.
특히 요즘식으로 말하면 경제작물 재배를 강조한 '임원경제지'의 '식화(식화)편'은 당시 국내적으로 이책 뿐이었다고 한다.
8도의 생산물과 장시(장시)의 규모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당시의도시 및 상공업발전과 결부시켜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그는 생산력증대를극대화하는 근대적 농업경영론의 체계를 모색하려고 했던 것이다.서유구의 둔전론(둔전론)역시 특이한 것이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실학(실학)사조가 일반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어느정도 보편화된 경향을 보이고 있었으나 집권 사대부양반들은 주자학적 권위주의에 집착, 시대변화에 무감각함으로써 홍경래란을 시발로 번지기 시작한 농민반란이 잇따라 유랑민이 급증하고 있었다.
그의 둔전론은 이들 유랑민을 구제하고 국가의 부(부)를 축적하는 방안으로 서울 동쪽 10여리에 버려진 땅(경사둔전)과 북쪽의 광활한 평야(북방둔전), 8도 감영(감영)의 땅(영하둔전)을 개간, 집단농장을 운영하자고 제의한것으로 현실성 있고 획기적인 정책구상이었다.
또 서유구는 이들 집단농장에서는 농사기술의 좋은점과 나쁜점을 연구해이를 확대보급 시키면 전반적인 농업기술 향상을 불러와 국부(국부)에 크게기여할 것이라고 하는가하면 당시 구황작물이었던 고구마의 보급확대를 위해 종래의 '감저보(감저보)' '감저신보'(감저신보)와 중국.일본의 관계 서적을 참고해 '종저보'(종저보)를 펴 내기도 했다.
이호철교수(경북대 농업경제학과)는 '임원경제지'는 농업의 1차생산에서 3차생산까지를 시대적 조건과 관련시켜 정연하게 정리한 조선시대 최대의 농학서로 평하고 WTO체제를 맞아 허둥대는 우리농업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이 방대한 책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그러나 '임원경제지'가 나오기까지는 서유구의 선대의 가학(가학)과 그보다 한세대 앞서 '중보산림경제'를 펴낸 유중림(유중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게 전문연구자들의 견해다.
대구 달성 서씨의 후손으로 경화거족(경화거족)이었던 조부 서명응(서명응)과 생부 서호수(서호수)는 생전에 북학파의 핵심 박지원을 비롯 이덕무,유득공, 박제가와 교류가 있었고 일찍부터 경직된 주자학보다는 천문.산술,음률과 같은 명물도수(명물도수)에 관한 학문에 관심을 둬 아버지는 '해동농서'(해동농서) 할아버지는 '고사신서'(고사신서)등 농서를 지었으며 서유구는 청년기때 이들 농서의 편찬을 도왔다.
정조 14년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나선 서유구는 이같은 가학의 배경에다순창군수 호남관찰사등 오랫동안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농업현실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3대동안 갈고 닦은 농학을 '임원경제지'에 집약할 수 있었다.한편 서유구보다 한세대 앞선 유중임(유중임)은 당시의 대표적 농서였던스승 유암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시대상황에 맞게 수정 증보했는데 이책에는 새로운 우리의 벼품종이 추가돼 있을뿐아니라 이름도 우리말로 표기돼있어 오늘날 우리나라 유전자원 연구의 보고로 평가된다.
또 이 '증보산림경제'(증보산림경제)에는 1년2작에 바탕을 둔 한전농업(한전농업)으로 수익성을 높일 것을 권장하고 옥수수재배법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등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의 방향을 미리 선도한 감이 없지도 않다.당쟁의 와중에서 한때낙향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북학파 실학자로는 드물게 대사헌 병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하는 등 높은 벼슬살이를 한 서유구는 82세로 경기도 광주 별장에서 탄금(탄금)을 들으며 장단 금릉리 선영에 안장됐다. 〈최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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