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자. 그냥 표연히 떠나는 것이다. 목욕탕 가는 정도로 지극히 간단하게 챙겨서는 마음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그냥 떠나는 것이다. 동쪽도 좋고 남쪽도 좋다. 멀리도 좋고 가까이도 좋다. 차를 타도 좋고 걸어서도 좋다. 일단 떠나고 보자.
계획을 세우고 짐을 가득 챙겨서 떠나는 그런 여행일랑 그만 두자. 하던 일 모두 끝내고 언제 떠나겠다는 말이냐. 당찮은 비교일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때 언제 누가 일 다 끝내놓고 계획 세워 떠나더냐. 그러다간 인생 백년은 고사하고 어느 천년에, 만년엔들 떠나겠는가말이다. 하던 일 그만두고 홀로 훌쩍 떠나는게 인생 아니던가. 그러고도 한마디 불평없이 아쉬움도 남기지 않은 채 획 돌아서서 떠나버리지 않던가.
명승고적지는 피하자. 온천이나 유명 약수터는 피하자. 유명 휴양지는 모두 피하자. 이런 곳은 이미 우리들의 심신을 병들게 할 뿐이다. 무조건 떠난 후 그날 기분에 따라 방향을 정하고, 그날 호주머니 사정에 맞추어 거리를 정하고, 그 거리에 따라 걷든지 타든지 정하면 그 뿐, 더 이상의 계획이 무엇에 필요하랴.
어느 이름 모를 간이역이나 호젓한 정류장에 내려 풀밭도 좋고 바닷가 깨끗한 바위라면 더욱 좋다. 앉아도 좋고 누워도 좋다. 사념에 잠겨도 좋고 멍하게 정말 바보처럼 멍하게 바라다만 보아도좋다. 세상의 복잡한 일들을 생각해도 말릴 사람은 없겠지만 그보다는 더 재미있는 생각도 하여보고, 어머니 생각, 어릴 때 생각, 태아 시절, 올챙이 시절, 아메바 시절, 우주인 시절을 생각해 보라. 그리곤 이 세상을 혼자 훌쩍 떠날 때도 생각해 보라.
이른 봄의 목련이나 화려한 모란보다 길가의 가냘픈 한송이 들풀이 더 아름답지 않던가. 이들과대화하려 길을 떠나자.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으므로.
〈경북대 부교수.중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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