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는 지난달 23일부터 지난 2일까지 11일간 중국을 거쳐 북한을 방문, 평양일원과 금강산지역을 취재하고 돌아온 캐나다주재 송광호특파원의 방북취재기를 싣는다. 김일성사후 불안정한 정치체제속에서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사회와 주민들의 생생한 모습을 현지 사진을 곁들여소개한다.
북한전체가 극심한 식량난 연료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금년을 '고난의 행군 마지막 해'로 정한 북한은 안간힘을 다해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려 애쓰는모습이 역력했다. 연료난 때문에 평양도 일요일은 디젤 및 휘발유를 연료로 하는 모든 교통수단은 일체 운행을 금지시켰다. 아무리 높은 당 간부라도 혼자서 차를 타고 다닐 수 없도록 철저히규제했다.
이러한 규칙에 걸려 일요일 기자를 도와주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던 운전기사가 단속에 걸려 다음날 내 일정까지 엉망이 된 일도 있다.
"빨치행동(불법으로 몰래 하는 행위를 말함)으로 움직이면 됩니다" 고 자신하며 안전원(교통)의눈을 피하려 했다가 잡혀 다음날 제시간에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양 대동강 호텔이 숙소인 기자는 매일 오전6시에는 대동강변에 나가 안내원과 함께 산책을 했다. 북한당국은 내 움직임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듯 했다. 기자가 지난 89년 북한 방문 당시 한차례 호텔을 뛰쳐나가 밤10시가 넘어 돌아온 적이 있는 '전과'가 있었기에 더욱 그러한지 모르겠다.하루는 안내원없이 혼자 일찍 대동강변에 나가 거닐다 71세의 이용길(가명)노인을 만났다. 그는심장병 때문에 자주 운동을 하러 새벽에 강가에 나온다고 했다. 기자가 "저는 캐나다에서 왔는데나라 사정이 퍽 힘든것 같아요"하자 "캐나다 대표단인가"한뒤 "그래, 우리나라 경제가 망태기가됐어"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배급이 제대로 안나오니 공장에서는 기계부속까지 떼어다 팔아먹는다는데, 참 큰일났어"한다.
"나는 김대(김일성대학) 종합대학 1기생이야, 4년제 경제학부를 나왔는데 오랫동안 저널리스트로있었지. 그러나 해설, 논문만 쓰며 책임자 노릇을 했지, 말을 만들고 하는 글은 쓸 줄 몰라" 그는한마디로 북한이 경제균형이 안맞는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전력 석탄난으로 더욱 나라사정이 어려운데 언제 이 악화된 사정이 좋아질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아침 대동강가에는 낚시하는 사람들이 적지않았다. 작은 우렁이(다슬기)를 잡으려는 소녀와 팬티바람으로 몸을 씻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겉보기에 평양은 여전했다. 연일 버스나 전차는 시민들로 가득 찼고 거리 구역마다에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려는 인파가 길게 줄을 지어 있었다. 기자가 마지막으로 북한을 방문했던 때인 지난 92년 2월과 비교해 큰 변화는 없는 듯싶었다. 깨끗한 도시환경, 주민들의 친절함, 계속 세워지는 건축물, 호텔에는 외국손님들이 드나들었고 가라오케(노래방)등의 오락시설도 많이 늘어나 있었다.92년 평양에 단 한곳이던 노래방이 지금은 10개로 늘어 각 호텔마다 설비를 갖추어 개인당 입장료를 5달러부터 25달러까지 받고 있었다.
노래방은 조선, 중국, 일본, 영어노래로 구분되어 주로 해외교포들이 이용했다.조선가요는 거의 북한노래 일색이었으나 유일하게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가요곡속에 있었고 인기가 가장 높았다. 기자가 아는 노래라곤 우리의 소원, 봉선화, 새타령, 도라지, 신고산타령등 우리민요 몇가지 뿐이었다.
1주에 2번 운행하는 베이징~평양간 비행기에는 1백38개좌석이 다 찬다고 한다. 스튜어디스는 이를 '만땅됐다'고 표현했다. 기자가 입국한 8월23일(토요일)에는 미국인들이 유난히 많았다. 곧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중 10명가량이 6·25당시 미군유해를 찾기 위해서였고 나머지는 유엔식량기구관계자들이었다. 이 유엔산하 소속 외국인들은 기자가 가는 어느 곳에나 있었다.대동강 호텔에는 밴쿠버에 거주하는 마이크 로우(56·유엔소속 설비기술자)가 함께 체류해 어느정도 정신적 위안이 됐다. 그는 북한 여러 도시에 낙후된 공장 시설들을 새 설비로 바꾸기 위한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곳 저곳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아예 식당의 둥근 식탁에 우리 두자리를 고정시켜 놓고 식사때마다 바깥세계의 정보와 북한에서의 경험을 나누었다.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죽은 소식도 그를 통해 들었다. 실상 바깥세계 정보라야 캐나다에 전화해 전해듣는 소식이 고작인데 마침 그가 부인에게 전화했을 때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외부로 나가는 국제전화요금은 무척 비쌌다. 요금은 1분에 약 8달러인데 신호음이 울리면서부터계산되고 있었다. (캐나다에는 수신자가 받을 때부터 요금이 부과됨).
"어제 간단한 팩스한장을 보내는데 45원(미화 22달러)이나 나왔소. 도대체 이렇게 비싼데가 또 어디 있겠소"
마이크는 투덜대며 턱없이 많이 나온 요금을 탓했다. 북한에서 판매하는 상품가격은 무엇이든 예전에 비해 무척이나 비싸졌다. 택시비도 종전보다 많이 올랐다. 얼마 안되는 택시(호텔)잡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특히 다른 지방으로 갈때의 연료비는 ㎞당 80센트로 계산했다. 예를 들어 평양~금강산 같은 왕복 6백㎞ 가 넘는 거리이니 금강산 구경을 하려면 최소 휘발유 값에만 미화 4백80달러가 소요되는 셈이다. 안내인은 "모든 물건 가격을 올렸습니다. 아무나 누구든지 쉽게 살수없도록 하기 위해서지요"라고 설명한다. 한번은 안내원이 새필름 1통을 원했다. 그러나 마침 여유가 없어 몇통 사려고 금강산 여러 상점이 들렀으나 전부 없다는 것이 아닌가. 금강산 관광지역에서 사진필름을 구할수 없다니…. 호텔측에선 "이곳에선 품절됐으나 원산에 나가면 살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사진필름은 원산 어느곳에서도, 평양의 고려호텔(특급)에 조차 없었다.우연히 북한 책자를 펴보니 유명 중국요리전문점이 한곳 소개돼 있어 운전기사, 책임지도 안내원과 함께 광복거리의 향만루 식당으로 찾아갔다. 북한 자장면 맛은 어떨까 해서였다. 그러나 요리점은 문이 닫힌채 손님을 받지 않았다. 미안하게 생각한 안내원은 다른 곳을 알아보자고 서너군데 돌아다녔으나 허사였다.
이는 대동강 숭어탕도 마찬가지였다. 예로부터 '평양에 와서 숭어탕을 맛보지 못하면 평양에 왔다는 말을 하지말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하긴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도 듣기에는 재료부족으로 외국인들을 받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다.
안내원조차 평양내의 상세한 실정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 혹은 알면서 모르는체 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평양의 호텔이나 큰 음식점에서 신용카드(비자및 마스터 카드)의 이용이 가능해진 사실을 안내원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메리컨 익스프레스(AMEX)카드는 받지 않았다.음식점을 찾아 다니던중 빙상관 앞에서 구걸행각을 하는 한 소년을 만났다. 운전사는 황급히 그를 쫓으려 했으나 그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안내원이 음식점의 영업 여부를 확인하려 자리를뜬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대여섯살 되어 보이는데…" "아닙니다. 한 열살은 됐을 것입니다" "평양에 저런 아이가 많습니까?" "집을 뛰쳐나온 아이들인데, 꽃잽이라고 하지요. 정부에서 아이들을 붙잡아 집으로 돌려보내도 다시 집을 자꾸 나와 골치를 앓습니다" 그는 꽃잽이에 관한 더이상의 대화를 꺼려하는 듯 했다. 나중 호텔로 돌아와 마이크에게 낮에 본 꽃잽이 얘기를 했더니,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신의주에는 그런 소년들이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띈다고 했다.
〈평양·宋珖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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