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무성영화는 1923년 윤백남 감독(1888~1954)이 제작한 '월하(月下)의 맹세'.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연극 공연의 일환으로 상영되던 연쇄극에서 탈피, 본격적인 극영화시대로 접어든다.
윤백남이 처음으로 각본.감독을 맡은 '월하의 맹세'는 조선총독부에서 지원한 저축장려영화.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1905~1928)와 권일청 등이 출연, 공공기관을 통해 전국에 무료상영됐다.
상설 영화관과 관객이 늘어나자 일본인 하야가와(早川松次郞)는 서울에서 동아문화협회라는영화사를 설립, 직접 제작.각본.감독한 고전 '춘향전'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변사 김조성이이몽룡역을, 기생 한룡이 춘향역을 맡아 남원에서 현지 촬영했으나, 일본인이 우리 고전을제대로 이해하지 못한채 만든 엉성한 영화였다.
부산에서는 일본인 사업가들이 자본금 20만원이라는 거액을 투자, 본격적인 극영화제작사인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이 영화사가 1925년에 제작한 두번째 작품 '운영전'(윤백남감독)에서 나운규(1902~1937)가 가마꾼역으로 영화에 데뷔한다.
이듬해 나운규는 민족영화 '아리랑'을 제작, 최고의 감독이자 배우로 부상한다. 그가 각본.감독.주연한 '아리랑'은 일제치하 조선민중의 비참한 생활상을 담아 전국 방방곡곡이 '아리랑'의 주제가로 메아리치게 했다.
1927년 단성사 박승필의 후원으로 프로덕션을 차린 나운규는 직접 제작.각본한 '사랑을 찾아서'를 1928년 우여곡절끝에 개봉한다. 일제침략으로 고향을 잃고 간도로 떠나는 실향민을그린 이 영화는 원제인 '두만강을 건너서'가 문제시돼 '저 강을 건너서'로 제명이 바뀌고많은 장면이 가위질당하는 등 우리 영화사 최초의 검열사건으로 기록된다.
발성영화가 등장하기전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은 무성영화의 전성기였다. 1927년 '강남달'이라는 한국 최초의 영화주제가로 유명한 '낙화유수'(이구영 감독)가 제작됐으며, 심훈감독.각본의 '먼동이 틀때', 이경손 감독의 '춘희' 등 많은 영화들이 쏟아졌다.당시 김학근, 박창원, 윤화 등 변사들은 영화의 맛을 살리는 감초역으로 배우를 능가하는 대인기를 끌었다. 외국의 무성영화로 붐을 이룬 1929년 '학생' 잡지에 실린 영화감상법은 당시관객들이 영화를 얼마나 신기하게 여겼는지를 엿보게 한다.
"키스하는 장면이 나올지라도 결코 흥분하지 마시오. 배우들은 키스한뒤에 반드시 양치질을한답니다"
"굉장한 건물이나 화려한 실내가 나오더라도 결코 놀라지 마시오. 사실은 책상위에 만들어놓은 조그만 장난감이랍니다"
〈金英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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