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통일의 싹 소중히 가꿔야

반공을 국시로 받들며 교육받아온 사람들은 붉은색만 보아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니던 때 북한엔 전부 뿔달린 도깨비 같은 이상한 외계인들만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새천년 처음맞는 광복절날. 인공기가 선명한 고려민항기를 타고 내려온 북한사람들은 이웃집 아저씨나 다정한 동네 할아버지처럼 다가왔다.

잠시 학교에 간다며 집을 나가 50년만에 반백이 되어 돌아온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우는 어머니, 전쟁통에 홀로 북에 남겨진 채 외롭게 살아온 딸과 어린 딸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온 어머니가 만나 부둥켜 안고 통곡하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꽃다운 나이에 서로 헤어져 주름진 얼굴에다 마디마디 굵은 손을 맞잡은 애틋한 부부에게 그 누가 지난 서러운 세월을 보상해 줄 것인가?

이념에, 전쟁에, 때론 독재권력에, 강대국들의 힘싸움에 휘둘리며 힘겨운 삶을 살아온 한반도 민초들은 그리운 부모형제를 꿈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지구상 단 하나 남은 분단국가의 철조망은 냉전의 전시물처럼 남과 북을 갈라놓고 한민족의 가슴에 못을 박아 놓았다. 이렇게 뜨거운 가슴으로 남에서 북에서 달려와 손을 맞잡으면 되는 것을,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굴곡많은 우리 역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그들의 통한에 찬 울부짖음을 보며 우리가 왜 하나로 꼭 만나야 하는가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냉전에서 화해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행여 이 문이 닫힐까 염려도 되지만 이젠 그 누구도 칠천만 겨레의 뜨거운 열망을 막을 수 없으리라.

남한에서 간 아버지를 만나는 창백한 얼굴의 딸이 남한의 팔순어머니 보다 더 늙어 보이는 화면을 보며 걱정이 되었다. 행여 조금 잘사는 남쪽 국민들에게 북한형제들의 초라한 모습이 체제의 우월성이나 확인하고 자만심에 찬 경솔함을 심어주지나 않을까 기우가 앞선다. 또 이산가족의 만남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에 얽매이지 않고 전쟁과 분단이 옭아맨 그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국가가 되찾아 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겨레 모두의 가슴마다 어렵게 틔운 만남의 싹을 소중히 가꾸어 남과 북이 백두에서 한라까지 손을 잡는 통일의 그날을 꿈꾸어 본다.

신문을 보며 또 눈물을 닦는 내게 초등학생인 딸이 하는 말이 가슴을 친다.

'왜 저 사람들은 엄마 아빠를 마음대로 못만나요? 남한과 북한이 서로 통일하자고 했으면 통일하면 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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