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에세이-가을편지

지난 주말 청도 각북 가는 길은 온통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만 넋을 놓게 하던 만산홍엽의 축제. 올 가을은 유난히 단풍 빛이 아름답구나 하고 혼자 되뇌면서 오랫동안 눈길을 놓지 못했습니다. 서리 묻은 가랑잎 봄꽃보다 더 붉다더니 사계가 뚜렷한 이 섧은 땅에 태어난 것이 그래도 복되다고 또 되뇌었습니다. 그렇게 또렷하고 맑게 울리던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아파트 앞 풀숲에서 자취 스러진 지도 몇 날이 되었습니다.

이 가을 저녁 별빛 두어 점 돋는 때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요? 이렇듯 한 해가 덧없이 가고 있구나 하고 낮게 탄식하셨는지요? 아니면 조지 윈스턴의 '가을'을 들으면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따뜻한 커피 향기 지그시 음미하고 있는지요?

◈만산홍엽의 축제

돌아보면 올 한 해도 참으로 어렵사리 지내왔습니다. 크게 기뻐할 일도 있었지만, 그것도 퍽도 짧은 시간이었고 노도처럼 쳐들어오는 견디기 힘든 사태 앞에 여태도 중심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것이 눈앞에 닥친 현실입니다. 우리를 몹시도 힘들게 하는 이런 멍에들이 무거운 어깨에서 쉬이 내려지지 않을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저며듭니다.

아침, 저녁나절에 부는 바람도 꽤 쌀쌀해졌습니다. 겨울 채비를 서둘러야 하겠지요? 그러나 어두운 일들을 몰아낼 듯이 아직은 다 못 탄 단풍이 산을 온통 뒤덮고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붉은 단풍들이 떠다니는 천년 된 못물 안에 노니는 금빛 잉어 떼의 고혹적인 눈부심을 말입니다. 그런 못물이 우리 안 어딘가에 출렁이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지요? 이런 상상은 삶이 결코 무상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일이 아닐까요? 며칠전 억새 흐드러진 화왕산 하산길에 서녘 하늘 멀리 떠오르는 노을 위로 비낀 커다란 무지개를 바라보다가 천년의 못물 속에 노니는 '금빛 잉어'를 불현듯 떠올려 보았습니다.

◈낙엽은 쓸쓸히 내리고…

지난 10월 어느 날 수도암 정상 부근에서 수백마리의 까마귀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죽음을 부르는 울음이라기보다 산정 가까운 곳까지 쫓기어 올라와서 살아가는 그들이기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 추스르는 몸부림 끝에 뱉는 의지의 울부짖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코 음산하게 들리지 않는 그 소리는 간절하게 귓전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까마귀떼들이 시린 하늘 드높이 솟구쳐 오를때 그 펼쳐진 양 날개가 햇빛을 받아 윤기로 몹시 반짝이는 것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검은 빛깔도 저렇듯 아름다울수가 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저마다 다른 가을의 소리

이 모든 특별한 느낌들은 올 가을 자주 산을 찾은 덕택에 얻은 소득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퍽 미안스럽군요. 나보다 시간의 여유가 덜한 이를 잊고 혼자 가을을 너무 즐긴 것 같아서입니다. 하지만 이런 귀중한 느낌을 조금이라도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제 심정임을 십분 헤아리시리라 여겨집니다.

만산홍엽의 가을산이 우리에게 가만가만 들려주는 소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마다 처한 상황속에서 그 뜻을 읽고 속깊이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닐까요? 입동이 지났지만 아직은 늦가을이라고 우기고 있을 청도 적천사 뜰의 은행나무 두 그루를 며칠뒤 만나러 갈 예정입니다. 그들이 고이 품고 있는 수천 수만의 금빛 은행잎이 온 뜰과 우리 마음을 뒤덮는 날 가을도 저물어 가겠지요. 또 쓰겠습니다. 이만 총총.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