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섯살의 허조씨. 주민등록상 그의 주소지는 경산시 와촌면. 그러나 잠을 청하는 곳은 파스퇴르 우유 대구 효목동 대리점이거나, 매일신문사 방촌지국 사무실이다. 잠자는 시간이래야 다 합쳐 겨우 하루 2, 3시간.
허씨의 하루는 시작과 끝을 알기 힘들다. 때문에 설명을 시작할 시점 잡기도 어렵다. 오후 1시30분, 그는 신문 지국에 도착한다. 광고 삽지를 챙기고 신문 320부의 배달을 시작한다. 끝내면 오후 5시30분.
그 다음엔 우유값 수금에 나선다. 그걸 마치면 이미 밤 10시. 그리고는 우유대리점으로 가 30분간의 짧은 수면. 수금이 잘 되면 조금 더 자고, 신통찮으면 덜 자야 한다.
다시 일어나야 하는 시간은 밤 10시30분. 배달할 우유 15종류 350개를 챙긴다. 밤 11시에 그는 또다시 길을 나선다. 어둠 속. 대리점을 출발한 그의 오토바이는 밤새 율하동·불로동·방촌동·신천동 골목길을 샅샅이 뒤진다.
그런 중에 닥쳐 오는 새벽. 허씨는 오토바이에 올라 앉은 채 어둠이 무겁게 내려 앉은 골목 귀퉁이에서 미리 사 뒀던 김밥이나 빵을 씹는다. 식당에서 식사하는 법이 없다. 한푼이라도 아껴야 하기 때문. 당연히 휴대폰도 삐삐도 전화도 명함도 없다. 돈 들어가는 것은 모두 없앴다. 값싸고 질긴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허다하다.
우유 배달이 끝나는 것은 오전 11시쯤. 꼬박 12시간 동안 배달을 다닌 셈이다. 대리점 한 구석에서 다시 1시간30분 동안의 수면. 그에게는 하루 중 가장 긴 잠이다. 이 사이클이 끝나면 오후 1시쯤엔 다시 서두른다. 간단한 세면과 식사를 마치고 1시30분쯤까지는 신문 지국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신문과 우유를 합치면 배달을 위해 하루 평균 15시간 이상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150여㎞를 달린다. 허조씨는 그렇게 한달에 200만원 가까이 번다. 오토바이 기름값, 식비 등을 빼면 남는 돈은 150여 만원.
그러나 허씨가 이 치열한 사이클을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작은 건설업체의 사장이었다. 하지만 IMF 이듬해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던 그 사업은 끝내 도산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지금은 신문·우유 배달로 돈을 모아, 못 줬던 인건비, 외상 자재값 등을 청산해 나가는 중이다.
2년 안에 빚을 갚고, 4년 안에는 작은 전셋방이라도 얻는 것이 허씨의 1차 목표이다. 그때 쯤이면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도 한자리에 모여 살 수 있으리라. 그의 아내는 직장을 구하러 서울로 떠나 있다. 일곱 살 난 딸은 노모에게 맡겼다.
"아침 8시에 출근하고 저녁 5시에 퇴근해야만 직장입니까? 출근시간이 어떻든, 넥타이를 맸든 작업복을 걸쳤든, 땀흘려 일하고 돈 벌면 그만이지요. 그래서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겠습니까?"
사업가에서 졸지에 배달부로 변모한 사람 답잖게 그는 담담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막막했습니다. 세상에 내가 할 일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 자살을 생각했었습니다". 농약을 사기도 했고, 얼어 죽으려 겨울 길바닥에 엎드려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바꿨다. 죽는 대신 가족과 나를 지키자! 그렇게 해서 '허조의 전쟁'은 시작됐다. 지금까지는 일단 승리.
허씨는 세상이 유토피아이거나 유토피아여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삶이란 놈이 동전 몇 개로 언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컴퓨터 오락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일단 몸을 던지겠다고 작정하고 나니 할 일은 많았습니다. 땀 흘리겠다고 마음 먹으니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의 성실함을 인정한 우유 대리점에서는 판촉을 지원해 줬고, 신문 지국에서는 월급을 더 얹어 주더라고 했다.
10층 이상 올라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허씨는 늘 기도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지켜 주십시오. 어쩌면 그 자신을 다독거리는 주문일지도 모를 일. 겨우 하루 두세시간 밖에 안되는 잠은 그를 힘들게 한다. 퀭한 눈,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휘청거리는 두 다리… 그러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꽃샘 추위를 무색케 했다.
2001년 3월, 정부는 이미 IMF와 휴전을 선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조의 전쟁'은 이제 시작됐다. 그는 평생 아내를 업어 주고 딸을 안아주며 살고 싶다고 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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