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농부들 절반한 사연 읊은 밭매기 소
따비질로 땅을 뒤지고 쟁기질로 밭을 가는 일도 힘들지만 호미질을 하며 밭을 매는 일도 여간 힘들지 않다. 보리밭은 이른 봄부터 두 세 차례 매 주어야 한다. 음력 2월부터 보리밭 매기를 시작하면 시월에 가을걷이를 끝낼 때까지 온 여름내 조밭·콩밭·목화밭 매기 등 들일을 쉬지 않고 해야 한다. 따라서 음력 2월 초하루가 지나면 일꾼들은 울타리를 잡고 울었다고 한다. 요즘도 울고 있는 농민들이 많다. 농업정책 부재로 다 가꾸어 놓은 농작물을 제 손으로 갈아엎어야 하는 고통 때문이다. 밭매기 소리를 통해서 일꾼들의 어려운 처지를 들어보자.
불꽃 거치나 더운 날에/ 묏등 같이 짓으나 밭은
한 골 매고 두 골을 매도/ 다른 정섬 다 나와도
이 내 정섬은 아니도 나오네
거창 사는 이순애 할머니의 밭매기 소리이다. 불꽃처럼 더운 날이면 한 여름이다. 무더위 속에서 밭매기를 하면 흙의 열기에 숨이 막히고 뙤약볕에 살갗이 타는 듯 뜨겁다. 더군다나 밭은 묘지의 봉분처럼 잡초가 무성하다. 밭에 농작물 외에 잡초가 많이 나 있는 것을 '짓었다'고 한다. 밭이 묘의 봉우리처럼 짓었으니 밭매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거기다가 점심조차 가져다 주는 이가 없다. 허기도 겹친다.돌 겉이도 여문 밭을/ 미 겉이도 짓은 밭을
광 너븐 저 밭으로/ 내 혼자 어이 매리
행주치마 둘처 입고/ 헌신짹이 떨떨 끌고
몽당 호미 손에 들고/ 밭에 가 엎드렸으니
땀은 흘러 비가 되고/ 목은 타여 불이 붙네
한 골 매고 두 골 매고/ 삼시 골을 매고 나니
땅이라 너라다 보니/ 먹물로 품은 듯고
하늘이라 쳐다보니/ 빌이 총총 나였구나
영천 사는 김병록 할머니 소리이다. '불같이도 더운 날'로 시작하여 날이 어두워 땅이 먹물처럼 보이고 하늘에 별이 총총할 때까지 밭을 매는 어려운 상황들을 아주 절실하게 노래했다. '땀은 흘러 비가 되고 목은 타서 불이 붙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 밭골은 이리키 질고/ 장장추월 긴긴 날에
해는 잡아 땡긴 겉이 길고/ 이 노릇을 어이할꼬
대구 침산동 현갑진 어른 소리이다. 이랑도 길고 해도 길다는 사실에서 밭매기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몇 이랑을 맸는가 하는 것이 밭매기 성과를 헤아리는 기준이자 보람인데, 밭이랑이 길면 밭을 매도 일 한 성과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밭이랑이 길 뿐 아니라 날도 길다. 여름 해가 긴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마치 누가 해를 잡아당기듯이 해가 쉽사리 저물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해가 저물어야 일을 마치고 비로소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땀은 나서 지드랑에 찔찔하고
못할 노릇은 이 노릇이로다
허허뿔사 농부신세 가련쿠나
주야장천 먹고 나면 일이로다
못 배운 죄로 동방 훤하만 날 샌 줄 알고
밥그릇 높으면 생일인 줄 알고
땡볕에서 밭을 매면 땀이 나서 겨드랑이가 젖는 것은 물론 온몸이 땀 범벅이 되기 일쑤이다. 더군다나 일시적인 일이 아니다. 농부신세란 자고 나도 일이요 먹고 나도 일이다. 글을 못 배운 나머지 동창이 훤하게 밝으면 날이 샌 줄을 알고, 밥그릇이 높으면 생일인 줄만 알 뿐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모른 채 짐승처럼 일만 하면서 살아간다는 신세타령이다. 아낙네들의 밭매기 소리에는 시집살이의 고통까지 겹쳐 더욱 절박하다.
은가락지 찌든 손에/ 비가락지가 웬일인고
바늘골미 잡든 손에/ 호무자리가 웬일인고
석자 세치 반포수건/ 호무자리 감어줌서
가잔다네 가잔다네/ 밭을 매러 가잔다네
친정에서 은가락지를 끼고 골무를 낀 채 바느질이나 하며 곱게 자란 처녀가 시집 와서 골무 대신 호미 자리를 들고 밭 매러 가자고 하니 기가 막힌다. 그래도 새각시의 처지를 배려했던지 긴 수건을 호미자리에 감아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배려는 예외일 뿐이다.
한 골 매고 두 골 매고/ 삼십 골로 매고 나니
점슴 때가 지즉하네/ 집이라꼬 찾아가니
시어머니 하는 말씀/ 그것도 일이라꼬
집이라꼬 찾아오나/ 밥이라꼬 주는 거는
엊지녁에 묵던 개떡/ 사발 눈에 볼라주고
쟁이라꼬 주는 거는/ 접시 눈에 볼라주고
진양 사는 황순희 아주머니 소리다. 일도 일이지만 일한 사람에게 밥을 주지 않는 것이 더욱 문제다. 점심때가 늦었는 데도 점심 소식이 없다. 허기를 견디다 못해 집으로 가니 시어머니가 '고까짓 일을 하고 벌써 밥 먹으로 온다'고 나무란다. 그러면서 주는 밥이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식은 밥이나 개떡을 사발에다 조금 발라 준다. 장도 접시 가에 조금 발라 준다.
그저 먹던 식은 밥은 사발굽에 단동만동
그저 먹던 쟁이랑은 종지굽에 단동만동
아이고 이걸 먹고/ 고자낭군 생기기도 어려운디
음석조차 유가시네/ 열두 폭 치매 톡톡 뜯어서
한 폭은 뜯어 고깔하고/ 두 폭은 뜯어 바랑 짓고
장성군의 정애순 할머니 소리이다. 종일 밭을 매고 집에 갔으나 밥을 사발 굽에 닿을락말락, 장을 종지 굽에 닿을락말락 주니 먹고 견딜 수 없다. 고자낭군을 섬기기도 어려운데 음식조차 유세를 피우니 살길을 찾아 절로 간다. 열 두 폭 치마를 뜯어 고깔과 바랑을 만들고 절에 가서 머리를 깎아 달라고 하니 중이 말린다. 운세도 아닌 부인/ 머리 깎잔 웬 소리요
그런 염려말고/ 곱게 가꾼 내 머리 깎아주소
한쪽 머리 깎고 나니/ 치매폭이 다 젖는구나
두쪽 머리 다 깎고 나니/ 무릎 밑에 쏘가 된다
밭매기의 극심한 노동과 시집식구들의 냉대가 여성들을 절로 내 몰았던 것이다. 절에 가서 살자면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다. 절에서는 중이 될 팔자가 아니라며 머리를 깎아주지 않으려 하는데도 기어코 깎는다. 머리를 깎을 때마다 눈물이 비오듯 하여 어느 덧 무릎 밑은 쏘(소·沼)가 되고 만다. 새댁이 세속을 떠나 중이 되는 것은 단순한 자기 희생이 아니다. 가중되는 농사일의 고통과 시집살이의 억압에 대한 처절한 저항이다.
오늘 우리 농민들도 같은 저항을 하고 있다. 과중한 농업노동의 고통과 정부의 농업정책 부재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다. 노동자들은 공권력에 얻어맞긴 하더라도 노사정위원회에 끼워주기나 하지만 농민들은 거기도 끼워주지 않는다. 그 탓인지 정부는 다시 중국산 마늘 1만 300톤을 8월까지 추가 도입한단다. 작년에 도입한 수만 톤의 중국산 마늘도 창고 속에서 그대로 묵어빠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잘 팔리는 휴대폰 더 많이 팔아먹기 위해서란다. 그 바람에 마늘 값은 벌써 폭락한 데다가 아예 산지에서는 거래마저 뚝 끊어졌다.
마늘농가는 지금 자기 마늘밭을 제 스스로 갈아엎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처절하게 정책에 저항하고 있다. 의성군수는 '제발 갈아엎지 말아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며 트랙터 앞에 들어누운 판에, 연합여당 대표들은 떼거리로 모여 골프를 즐기느라 희희낙락이다. 아무리 농지거리지만 지금이 어느 땐데 싱글을 치면 1천만원을 주겠다며 법석을 떠는가. 농민들이 갈아엎는 마늘밭이 눈물밭인 줄 정말 모를까. 강한 여당이 아니라 정말 뻔뻔스러운 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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