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는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고 한다. 불황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리라는 기대가 지역에서도 싹트고 있다.
그런데 대구상공회의소가 지난달 발표한 '2002년 대구지역 경제 전망'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260개 기업을 대상으로 경기회복 시기를 물었는데 올해 1분 기라고 내다본 기업은 0.6%에 불과하고 2분기 10.4%, 3분기 30.5%, 4분기 29.9%로 시기를 늦춰 잡은 기업이 압도적이었던 점이다. 아예 내년 이후로 예상한 기업도 28.6%나 됐다.
국내외 연구기관들이 올 봄부터 경기가 회복국면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한 것에 비 하면 무척 조심스런 분위기다. 그만큼 지역이 대세를 주도하지 못하고 전국 흐름 에 종속돼 있다고 보면 억측일까.
경기를 일찍 타느냐 늦게 타느냐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산업구 조에 따라 경기순환적 국면에서의 시기 차이는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진지한 고민은 대구.경북이 자생적인 발전구조를 갖고 있느냐, 혹은 아직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구축할 가능성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설잡아 말하자면 우리는 90년대 중반 이후 발전의 원동력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지금껏 마땅한 대안이나 비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위천공단'과 '자동차산업벨트'다. 이 두 계 획은 대구시의 산업발전계획에서 양대 기본축의 위치를 차지할 만큼 비중있는 것이었다.
200만평이 넘는 대규모 산업단지를 지방비 아닌 국비로 조성해 저공해 첨단산업을 유치하고 외국인투자촉진지구를 겸해 도심지 공단을 대체할 산업생산의 차세대 주력으로 키운다는 게 위천공단이었다.
자동차산업벨트 역시 완성차업체를 유치하 고 부품업체를 육성해 부평, 군산, 울산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L자형 벨트 구축으 로 대구를 세계 최고의 자동차 생산도시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구상이었다.
그런데 정치.지역적 이해관계와 외환위기 등이 겹치면서 시의 계획은 출발에서부 터 어긋난 것이다. 문제는 이게 과거사로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몇년동안 발목을 얽어맨다는 데 있다.
"산업용지난이 가장 심각한 현안입니다. 땅 있느냐고 물어오는 외국기업도 더러 있지만 공장 지을 부지라고는 동난 지 오래이니까…"
월배 비상활주로다, 탄약고 부지다 해서 자투리 땅 찾아다니기에 하루가 바쁘다는 시청 한 간부공무원의 요즘 일과는 위천공단 무산 후유증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용지난을 어느 정도 해소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구지지방산업단지 입주 시기는 일 러야 2005년 하반기다.
중추관리기능을 강화한다는 기본방침도 퇴색했다. 서울로 옮겨간 지역 기업 및 서 울 무역부를 대구로 다시 오게 한다는 정책은 거의 실현되지 못했다. 중추관리기 능 중심지로 입안된 동대구역세권은 아직 꿰지 못한 구슬이다.
영남권 내륙화물기지(복합화물터미널) 유치, 서대구화물역 건설, 검단동 종합물류 단지 조성 등 물류사업 역시 무산됐거나 민간사업자를 구하지 못해 지지부진을 면 치 못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같은 현실과 대구시의 인식 사이에 놓여진 간극이다. 대구시는 산업인프라 구축과 전통산업 고도화, 첨단미래산업 입지여건 개선 등으 로 경제 도약의 새로운 원동력을 마련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주력산업인 섬유, 기계.금속업의 부진이 심각하고 차세대산업이랄 수 있는 벤처 및 첨단산업은 채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게 현실일 것이다.
경북에선 대구와는 또 다른 문제가 불거져 있다. 비전 부재보다는 온갖 청사진을 망라해놓은 비전 과잉이 문제다. 첨단산업이란 이름이 붙은 업종은 죄다 추진하겠 다는 자세다.
첨단생물산업 육성방안만 해도 그렇다. 안동에 생물자원연구센터, 상주에 생물소 재기술혁신센터를 설치하겠다는데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지 분명치 않다.
"중요한 것은 하고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첨단산 업도 좋지만 연구인력을 어떻게 유치할 것인지 하는 문제 하나만 진지하게 고민했 더라도 백화점식 정책 나열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역의 한 연구기관 책임자 는 이렇게 지적했다.
위천이나 차벨트처럼 우리는 그냥 주저앉고 말까? "조금 과장해서 작년 4월 이전 지역에는 '컨벤션산업'이란 단어 자체가 없었습니 다. 대구전시컨벤션센터라는 건물이 문을 연 지 1년도 안 돼 컨벤션산업에 대한 인식은 엄청나게 확산됐지요".
대구전시컨벤션센터 강충 이사는 산업인프라가 주 는 효과를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대구전시컨벤션센터만 개관한 것은 아니다. 밀라노프로젝트, 기계부품소재기술혁 신센터, 성서첨단산업단지, 대구종합유통단지, 대구테크노파크, 대구벤처센터, 대 구국제공항 등이 지역 산업지도에서 새로 부각됐다.
특수가공사를 개발, 공급해 업체들이 지난해 가을 이후에만 2억4천만달러 수출실 적을 올리게끔 도운 신제품개발센터, 조성 1년만에 1천200억원 매출 달성과 800명 고용 창출을 이룬 성서첨단산업단지, 상당수 입주업체가 내일을 낙관하는 대구종 합유통단지….
"그런 업종이 있는지 아는 이조차 드물었던 전시기획전문업(PCO)을 해보겠다는 이 들이 지난해 소수지만 나서기 시작한 것만도 될성부른 징조 아니겠어요?" 대구전 시컨벤션센터 강 이사의 덧붙임이다.
이제 비전에 대한 결론을 말해보자. 지금까지 행정당국이 지역민 누구나 공감할만 한 굵직한 비전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방면에서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민간부문 역시 변화의 흐름에 둔감한 이들도 많지만 불황속에서 흑자장부를 챙기는 기업인 역시 적잖다.
"비전이란 있다, 없다의 문제라기보다는 만들어낸다, 못 만들어낸다의 차원 아닐 까요? 지역내총생산(GRDP) 9년 연속 전국 최하위 같은 통계에 절어 대구를 빠져나 갈 궁리에 급급한 사람이 바로 비전 없는 이들입니다". 대구상공회의소 이희태 상 근부회장은 위천이나 차벨트의 좌절 속에서도 내일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행정당국이 해야할 일이 나타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비전 그 자 체라기보다는 비전을 만들고 인식시키고 실현해나가는 리더십이 아닐까.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한 논의의 장이 필요한 게 아닐까. 독주하는 행정보다는 중지를 모 아 차선이라도 같이 추구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상훈기자 azzz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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