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중국도자기 어제와 오늘-(3)차그릇 자사호

언제부턴지 우리 찻집에서도 앙증맞고 빨간 다관(茶罐)에 중국차를 우려마시는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게 되었다. 한두번 볼 때는 유난스럽다 싶더니만 이제는 으레 중국다도는 저런가보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차마시는 모습이 왠지 옹색스럽게 느껴지고, 특히 다구(茶具)들이 불그죽죽한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불거죽죽한 자사(紫砂) 차그릇'이 중국도예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도자기이라기에 이번 취재길에 부딪쳐 볼 수밖에 없다는 묘한 오기가 발동했다.

자사의 고향 이싱(宜興)은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항저우(杭州) 세 점을 잇는 중앙에 거대한 호수 타이후(太湖)를 끼고 있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타이후의 물결을 따라 이싱에서 상하이로 또는 항저우로 운항하는 여객선이 있었는데 지금은 도로가 발달해서 없어졌다고 한다.

항저우에서 출발한 차가, 중국고대문화 가운데 하나인 랑저우(浪州)문화유적지 위항(余杭)을 거쳐 달려갔다. 여행하는 동안 차안에서 왜 중국 사람들은 유독 붉은 색의 자사 다관으로 차를 많이 마시는지 동행한 중국미술학원 김 선생과 리우정(劉正)교수에게 물었다.

한마디로 자사다관은 '공부차(工夫茶)'의 다법과 붉은 색을 좋아하는 그들의 심성이 어우러져 빚어낸 중국만의 산물이란 설명이다.

공부차는 명(明), 청(淸)대 사이 중국 남부지방 푸지엔, 광둥, 하이난성 일대에서 시작된 음다법으로 이들 지역에서 나는 차를 뜨거운 물에 우려먹는다.

공부차를 마시는 법에는 48도(道), 24도, 8도 등이 있는데 다법 핵심은 어떻게 차의 맛과 향을 잃지 않고 온기(溫氣)를 보존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때문에 공부차 다법은 한국, 일본과 달리 두 개의 다관을 사용하며, 차를 우릴 때에도 다관 뚜껑에 뜨거운 물을 부어준다.

이런 독특한 행다(行茶)와 관련 공부차에는 전해내려오는 네가지 보물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맹신(孟臣)이 자사로 만든 다관이 있다. 곧 공부차에는 자사 다관이 최상의 다구란 믿음이 뿌리박히게 되고 그 기풍은 타이후의 잔잔한 물결을 타고 중국 각지로 뻗어나가 오늘날 이싱 자사 다관이 중국다도의 기본다구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위항에서 한시간 가량을 더 달리자 무중력 상태의 고요한 바다와도 같은 타이후가 홀연히 나타난다. 8차로의 넓은 도로와 갓길에는 도석을 가득 실은 트럭과 경운기가 수십대씩 줄지어 달린다. 저렇게 많은 도석들이 모두 자사 다관(茶罐)을 만드는데 쓰이는가 했더니, 이싱은 다관도 유명하지만 인근에는 시멘트 공장, 화분 공장, 항아리 공장도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이싱이 가까워지자 길가에는 화분 상점들이 열병이라도 하 듯 줄지어 있다. 10여km는 됨직한 노변 상점앞에 진열된 화분들은 대부분 크기가 지름 1m는 족히이 될 성 싶다. 역시 중국은 화분 하나도 거창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싱 자사 다기를 주로 만드는 중심지는 이싱시에서 조금 떨어진 딩산(丁山)으로 이 곳은 인구 10만중 절반이 도업(陶業)에 매달려 있다. 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규모 생산시설에 종사하는 도공도 있지만, 가정에서 나홀로 작업을 해서 가계에 보태는 도예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딩산에 도착하자 '고급공예사' 칭호를 받으며 독특한 작업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우광잉(吳光榮), 쉬엔춘(許艶春) 부부작가가 마중나와 있었다. 우씨 부부는 시가지 외곽 아파트 자택으로 초대했다. 그의 집을 들어서자 이싱에서 인정받는 도예가이다보니 거실이 온통 자사에 묻혀 사는 듯한 인상이 물씬 풍긴다. 특히 지구의 원천은 물이라는 명제 아래 오대양 육대주를 자사 다관의 찻물로 순화시킨다는 현대도예 작품이 눈에 띈다.

우씨 부부는 다시 아파트 옆 조그마한 작업실로 데려갔다.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의 다른 지역 도예공방을 비교했을 때 이싱의 공방은 완전히 기존의 선입견을 깨버렸다. 흙물이 튀기고 흙더미, 유약, 각종 도구들이 어지러이 늘린 작업장이 아닌, 마치 아담한 사무실과도 같은 분위기다. 열평 남짓한 작업실에는, 책상과 흡사한 두툼한 원목판의 작업대, 그 위 작업도구를 담은 연필꽂이 통 서너개, 수제비 반죽만한 흙덩이가 전부였다.

작업도구가 이것뿐이냐고 묻자 오씨 부부는 "자사 작업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고도의 미적 감각, 오랜 숙련도를 요구하지만 작업 과정 전체는 매우 단순하고 분화되어 있어 비교적 단출하다"고 말했다. 동행한 김 선생은 "이싱의 자사호(紫砂壺)는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많은 도구나 흙이 필요치 않다"고 설명했다.

차그릇인 자사호를 만드는 작업은 원명대(元明代)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다관의 형태, 제작기법, 심지어 문양까지도 고스란히 계승되어 내려왔다. 도예가들은 바로 작업할 수 있는 반죽된 흙을 사다가 쓴다. 그 흙은 무척 비싸 콩알만큼도 허비하지 않는다. 하루동안 다관 두, 세 개를 만드는 작업량의 흙은 5kg정도면 충분하다.

작업과정도 도자기를 만드는 집인지 모를만큼 조용조용 진행된다. 자사호 만들기는 우선 흙덩이를 책상위에 올려두고 넙적한 방망이로 두드려 고르게 편다. 편편하게 펴진 흙판은 마치 천으로 양복을 짓 듯 칼로 재단한다. 마치 만두피 같은 얇은 흙판을 손으로 쪼물쪼물 다관의 형태를 잡는다. 다관 몸통이 꾸덕꾸덕 마를 때쯤이면 다시 명함 크기 정도의 흙판으로 뚜껑, 주둥이, 손잡이를 만들어 붙이면 성형작업은 끝나는 것이다.

일행은 우씨 부부의 작품과 작업과정 설명을 들은 후 함께 이싱을 대표하는 자사호 요장 '이싱자사 제1공예창(宜興紫砂 第1工藝廠)'으로 향했다. 이싱에는 중국 개방화 이후 자사호 다관을 찾는 대만인이나 화교들이 크게 늘어나자 '자사 제1, 2공창'을 설립했는데 전성기에는 각각 종업원이 1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제2공창의 경우 경쟁력을 잃어 민간에 불하된 후 겨우 명맥만 이어가며, 제1공창은 규모는 줄였으나 여전히 예술성 높은 다관으로 성가를 올리고 있다. 10층이 넘는 거대한 제1공창은 마침 일요일이라 전시실만 개방하고 잔업자 몇몇만이 나와 일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공예사로 일하는 쉬엔춘 여사의 안내로 곧장 부창장(副廠長) 집무실로 갔다. 강소성 공예미술대사이자 제1공창 최고 책임자인 파오즈창(鮑志强)부창장은 일행을 반갑게 맞으며, 문이 걸어 잠긴 박물관을 따고 자사호 유물 하나하나에 대해 설명해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불그죽죽한 빛깔의 자사 다관도 여느 다관과 같이 찻물이 많이 배이고 오래 쓰게 되면 윤기가 흐르고 수택(手澤)이 나게 마련인데 박물관에는 수백년전 명인들의 작품들이 오랜 연륜을 담고 소담스레 자리하고 있었다.

전 세계 다도인들이 찬탄해 마지않는 자사 다관은 처음 만들어진 이래 지금까지 그 모양새나 문양, 크기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져오고 있는 현장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전통, 중국의 힘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명치끝으로부터 일말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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