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열규 세상읽기-자랑스런 대구시향을 위해

"자랑스런 대구 시향(市響)을 위해서". 좀이 아니라 꽤나 오래된 이야기를 하자니 영 내키질 않는다. 하지만 새삼스레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아서 그것도 대구를 위해서 그럴 것 같아서 묵은 기억을여기 들추어 놓는다. 근 삼십 전이다.

그 때 필자는 보스턴 교향악단의 '시즌 티켓', 이를테면 일년 회원권을 구입했었다. 오자와가 상임 지휘, 콜린 데이비스가 객원 지휘를 하던 때다. 그 일년동안 내내, 바로 그 시즌 티켓 덕택에 나는 '인생의 황금기'를 누린 것 같은 감회를 지금도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때 얻은 교훈 또는 감동에 관해서 , 두 세 가지를 이제부터 풀어 볼까 한다.

첫째는 대학생들을 위한 '러시 티켓'이다. 글쎄 뭐라고 번역하는 게 좋을까? 곧이곧대로 옮기면 '돌진 표'쯤 될 '러시 티켓'은 선착순 싸구려 표다. 그것을손에 넣기 위해서 다들 질주하다시피 해서는 선착을 다투니까 붙은 이름이다. 몇 안되는 자리이되, 그나마 삼층 맨 꼭대기 구석으로 한정해서 대학생들에게특전을 베푼 것이다.

둘째는 첫 연주회 날, 중간 휴식시간에 펼쳐진 '리셉션 파티'를 이야기하고 싶다. 정장 차림이 아니던 필자는 어째 어줍잖아서 잔치 상을 멀리서 바라본 것뿐이지만, 무엇인가 탐스럽게 느껴졌다. 희희낙락하는 청중들의 웃음이 무슨 오페라의 합창처럼 들려 오기도 했었다.

셋째는 좀 이야기가 길다. 워싱턴에서 친구가 찾아와서는 보스턴 심포니를 듣고 싶다고 했다. '어림없는 소리, 시즌 티켓도 없이 무슨 수로?' 내 티켓은 화요일 시리즈 전용이었다. 그가 온 날은 금요일이라서 내 표마저 무용지물이었다.

나의 콧방귀를 무시하고 그는 나를 몰아세웠다. 정 안되면 심포니 홀이라도 구경하면 그게 여간한 개평이냐면서 끌다시피 나를 데리고 나섰다. 홀의 정문 앞에 섰을 때, 웬 젊은 백인 사내가 계단 위에서 티켓을 흔들어대고있는 게 보였다.

미국 청년들이 곧잘 하는 그 시시한 또 다른 장난질일 테지 하고 쳐다보고 있는데, 그가 다가 왔다. 필요하면 주겠다고 했다. '세상에!?' 미국에 서툰,웬 동양인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딱했던지,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사연을 털어놓았다. 갑자기 일이 생겼단다. 집이 마침 홀 근처라서 누구든 원하는 사람에게 줄까하고 아까부터 기다렸다는 것이다. 지갑을 꺼냈더니 그가 손을 내저었다.

'표 안 썩히는 게 어딘데!' 그러면서 그는 표를 건네주곤 갔다. 멀어져 가면서도 그는 한참을 등 너머로 손을 흔들어댔다. 표는 마침 두 장이었다. 그런 덕에 그 날의 연주 곡목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슈만의 A 단조의 피아노 협주곡에 티펫의 교향곡 일 번. 생전 처음 들은 거라서 티펫의 강동은지금도 알알하다. 하긴 공짜로 들었으니까 그게 또 한 몫 거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나의 화요일 시리즈에는 티펫은 안 들어 있었으니 벌어도여간 크게 번 게 아니다.

이 낡은 이야기를 새삼 꺼낸 것은 대구 시향이 새로이 러시아 출신의 중견 지휘자, 박탕 조르다니아를 상임으로 새 출발한다는 보도를 근자에 보았기때문이다. 그 새로운 출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라는 것도 굳이 덧붙이고 싶다.

러시 티켓과 첫 공연을 위한 잔치는 교향악단에서 베푼 시민을 위한 배려요 서비스다. 대구 시향에서도 이미 이에 버금 갈 대 시민 서비스를 하고 있을 줄 믿는다. 하지만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을 대학생을 위한 '러시 티켓' 한 가지 정도는 본따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한편 시민들을 위해서는 일부러 벼름벼름, 남에게 표를 공짜로 주고 가던 저 보스턴의 백인 청년의 일화를 꽃다발 던지면서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단적으로 군소리 없이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음악에 대한, 자기 도시의 교향악단에 대한 프레스토와 비바체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김열규(인제대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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