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상덕의 대중문화 엿보기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 최민식과 홍콩 배우 장백지가 주연한 영화 '파이란'의 카피가 고등학교 문법교과서에 실려 화제다. 교과서는 이 카피로 홑문장, 겹문장을 설명하면서 문자의 효과를극대화한 표현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없다. 카피일 뿐이다. 여자를 업고 있는 서러운 남자의 슬프고 아린 포스터도 마찬가지. 영화 속의 장면이 아니다. 홍보를 위한 컨셉일 뿐이다.

"당신은 키스가 필요해. 자주, 그것도 잘 하는 사람으로부터".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클라크 케이블이비비안 리의 손을 잡으며 말한 명대사.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이 명대사를 찾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카피와 포스터가 영화 속에 실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적과의 동침'도 그렇다. 광고물에 나오는 투명할 정도로 깨끗한 대저택, 빨간 장미꽃을 선물하는 남자의 콧수염, 남부러울 것 없이 보이는 여자의 겁에 질린 표정이 영화를 직관하도록 도와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관객 점유율 40%이상으로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까지도 따돌리던 한국영화의 최근 행보가 심상치 않다.

작년에 수출되어 지금도 일본전역에서 상영되는 한국영화다. 재미있는 플롯을 인정받아 할리우드에 스토리텔링을 판 영화산업이었다. 하지만 한국영화의 위기는 이미 예견되어왔다. 욕설이 난무하는 대사 때문이다.

'무제'를 제목으로 내걸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전시장의 무식이 영화판에도 있었다. 직관이 불가능한 기승전결도 한 몫 했다. 가벼움만으로 장식한 주제가 주류였다.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충무로가 영화발전 초창기와 같은 영화제작시스템을 고수하는 데 있다. 감독이 이미지를 독점하고 시나리오는 메모에 불과하다.

시나리오 작가를 겸하는 감독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원래 시나리오는 대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촬영대본이다. 감독은 물론이고 배우,스태프 모두에게 공동의 이미지를 제공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영화가 '잔상의 예술'로 불리는 까닭은 처음 본 정지된 영상이 움직이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포스터나 카피도 같다. 관객은 그것만으로도 영화의 이미지를 상상한다. 그래서다. 홍보 따로 영화 따로는 곤란하다. 겉과 속이 일치하는 건강함만이 한국영화를 지켜주는 열쇠다.다행스럽게도 한국영화의 겉꾸미기는 세계에서도 인정받는다.

대경대 방송연예제작학과 교수sdhant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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