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적이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圓嶠) 이광사(1705~1777)는 18세기 최고명필로 꼽혔다. 그러나그뒤 불세출의 서예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에 의해 '속기(俗氣)있는 글씨'로 매도당하며 서예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과연 원교체는 그 정도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글씨인가.
문정자(단국대)교수는 14일 대구시민회관에서 열린 '제9회 전국서학연구발표대회(대구서학회 주최)'에서 '원교 이광사의 원교체 형성요인에 관한 검토(원교체의 진정한 특질은 개성인가, 속기인가)'논문을 통해 150년간 오명을 뒤집어쓴 원교체의 복권을 시도했다.
문교수는 "추사가 그당시 혁신적 서풍을 몰고 왔던 청나라 완원(阮元·1764~1849)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고, 추사 이전의 대표적 서가인 원교를 맹비판해 18세기 서예사의 공백을 낳게했다"고 분석했다. 완원은 한나라때 비문글씨체의 준경한 법도에 근거해 바꿔야 한다는 '북비정통론(北碑正統論)'을 주창한 서예가다.
원교는 자신의 서론에서 왕희지체를 모델로 하면서도 위진(魏晉)의 비문글씨체를 학습할 것을 주장하고 당송(唐宋)대의 글씨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당송 서가를 존중하는 추사와는 서관이 서로 달라 그에게 비판받는 원인이 됐다.
원교는 '인간은 자연과 감응하는 가운데 일체감을 맛보는 것이고, 글씨는 자연의 내재적 변환의 속성을 체인(體認)해 표현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조형의식을 갖고 있었고, 이는 이전 그 어디에도 볼 수 없었던 개성적이고 생소한 조형으로 원교체를 탄생시켰다.
그당시 원교의 글씨는 동시대인들에게 "사납고 호방하며 빼어나지 않음이 없으니 참으로 은갈고리나 쇠줄과 같아 용이 날고 호랑이가 솟구쳐오르는 듯한 기상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교체는 호방한 기상, 험경한 획, 자유분방한 조형 등의 강한 개성을 보여주는 글씨로,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생적으로 발전시킨 민족적인 서체인 셈이다.
문교수는 "원교의 치열한 열정은 한국 서예사에서 그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희귀하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임에 분명한데도,추사의 비판 이후 우리 서예계에서 단 한차례도 점검되거나 검토되지 않은채 파묻혀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원교 이광사는 숙종 31년 예조판서를 지낸 진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소론(少論)의 실각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으며, 시서화에 모두 뛰어난귀재였지만 50세때 역모사건에 연좌돼 진도로 귀양가 불우한 생을 마쳤다.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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