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강원도 오지에서 보냈다.
갑자기 내린 폭설로 낯익은 세상은 꼭꼭 숨어 버렸다.
포복한 군인마냥 설야를 지키는 불빛들이 드문드문 신호를 보내자 겨울별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눈 속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시간이 이어졌다.
빠르게 변화해 가는 세상으로 열려져 있던 창을 모처럼 닫아걸고 나도 책을 읽는다.
함박눈은 무섭지 않아요. 오히려 작은 싸락눈이 소리 없이 내리면 어느 새 장독이 사라지고 또 눈 떠보면 울타리가 보이지 않지요.
안주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조금씩 독서량이 늘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이치를 느꼈다.
바쁜 일과에 쫓겨 허둥거리며 책을 삼키던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싸락눈을 맞듯 음미하며 읽는다.
작은 글자들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책 속으로 나는 빠져 들어갔다.
찻물이 끓고 소나무 위에 쌓여 있던 눈덩이가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가 잠든 밤 이 깊은 골짜기에서 누군가와 명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행복하다.
갑자기 문장의 호흡이 길고 어렵다.
왔던 길을 거슬러 또박또박 다시 읽노라니 이내 작은 쉼표의 필요성과 소중함을 깨닫는다.
무턱대고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들과 그 지루한 문장이 닮아 있어 놓친 시간이 아깝지 않다.
쉽고 평범한 이야기에 감동적인 진실이 담겨 있거나 사색하지 않으면 결코 건질 수 없는 귀한 진리들이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세상은 뭐든지 새롭다.
내면은 충만감으로 들떠 있고 무심히 지나치던 마른 풀 포기조차 어제와 달라 보인다.
이러한 즐거움 때문에 책의 역사는 길고 발전적일지 모른다.
책은 또 하나의 사람이고 또 하나의 인생이다.
볼품 없는 모과가 아름다운 향을 간직한 것처럼 책도 저마다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우리를 기다린다.
그 소중한 책을 우리는 잊고 지내는 건 아닐까. 계미년 새해에는 서두르지 않고 쉼 없이 책을 읽으며 지루한 삶 속에 쉼표를 찍어 나가리라.
조낭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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