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하는 오후

잡목림 마른 풀섶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늙은 엽사는 흰 가루를 털며 말했다

-상처 입은 사슴이 가장 높이 뛴다.

밤새 모국어의 가시에 상처 입은 나는 흰 눈위에 핏자국을 남긴 사슴의 최후의 점프를 생각하며 걸었다 바다처럼 번득이는 언어의 슬픈 물빛을 찾아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

피는 붉은 것만은 아니다 피는 울음처럼 맑을 수 있다 흰 꽃잎이 눈송이처럼 무너지고 있는 눈부신 길을 걷는 나는 나의 상처다

-허만하,'상처'일부

뇌일혈로 쓰러져 한쪽 몸이 불편한 최근 이 시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가해자(엽사)와 피해자(사슴)와 내(시인)가 하나의 진술자로 되어 있다.

시의 언어를 두고 밤새 탐색하며 몸부림하고 있는 치열성이 있다.

그의 시에는 땅밑에 흐르는 용암같은 에너지가 있다.

(권기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