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 통치행위, 국익?

거액 외화 대북송금사건은 단순한 의혹에서 이젠 사실로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느 정파에선 사실무근, 무책임한 정치공세라고 하던 종전 태도를 바꾸어 통치행위에 해당하니 덮어두자고 하였다가 최근에는 국익을 위하여 정치적으로 해결하자는 입장을 취하는 것 같지만 최종적인 입장이 어떠한지는 오리무중이다.

사실무근이라고 딱 잡아뗐을 때 별로 믿지 않았던 것 처럼 국익을 위한 통치행위라는 말에서도 국민들은 별로 감동하지 못할 것 같다.

통치행위라는 개념은 오로지 국가와 국민의 중대한 명운과 이익을 위해서라는 존엄한 외피와는 달리 그 이면에는 음습한 권력의 냄새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민주공화국 체제의 법치주의 이념과 삼권분립 제도 아래서, 과연 국가 기관의 행위 중 예외적으로 사법적 감시와 심사의 영역을 벗어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 즉 통치행위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사적으로 보아 통치행위는 역사적 실재현상이었지만 학설적으로는 긍정설과 부정설이 대립되어 왔는데 부인하는 것이 오늘날의 주류적 경향인 듯하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의 비상한 권한들에 대해 근거 규정과 동시에 제한 규정을 두고 있는데 계엄권에 대해서는 국회의 해제요구권을 인정하고 있고, 긴급처분 명령권, 예산외 국가부담계약, 상호 원조 조약, 중대한 재정 부담 조약 체결에 있어서는 국회의 의결을 거치거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다.

대통령의 면책 특권은 '재직중' 형사상 소추되지 않는 한시적 유보일 뿐이다.

이러한 관련규정에 비추어 보면 현행 헌법이 대통령에게 입법부의 견제, 사법부의 적법성 심사를 벗어나는, 예외적 영역을 허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지면 관계상 삼권 분립의 본질적인 문제, 통치행위를 인정할 것인지 여부, 인정된다면 그 내포와 외연이 무엇인지 여부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는 없지만 다만 몇 가지 점에 관해서는 미리 짚어 두고 싶다.

첫째, 만약 통치행위라는 사법치외영역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떤 행위가 통치행위의 요건을 갖춘 것인지 여부를 행위자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자기판단금지원칙에 어긋나는 부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둘째, 정치적 사회적 평가-관련자에 대한 형사적 책임, 손해배상 혹은 구상책임의 문제 등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일단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 에 앞서 진실부터 명명백백히 밝혀야 할 것 아닌가. 우리 법률은 실정법 위반의 강한 의심이 있는 사건에 대해 검찰이 수사를 하도록 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라는 수사(修辭)를 남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정치권력이 권력과 당파의 이익을 위해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와 방법을 어기고자 할 때마다 이러한 수사가 동원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상 알고 있다.

국익과 국민을 위하는 방법과 절차는 이미 법에 명백히 밝혀져 있다.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와 방법에 따라 그대로 '집행'하는 것이 국익과 국민을 위하는 길이다.

진실은 간결한 표현 속에 깃들어 있고, 헌법은 원칙적으로 정언명령(定言命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도 가리지 않은 채 통치행위 혹은 국익이라는 낡은 금의를 덮어씌워 역사의 뒤안길로 묻어 두자, 정치적으로 해결하자고 하는 것은 반헌법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우리가 선택한 국가 체제와 헌법의 현존 형식과 내용, 현재 우리 사회의 지배적 정치관념, 국가권력이 점점 낮은 곳으로 임하고 있는 정치현실, 예외적인 특권이 종식되어가는 사회의 발전방향 등 오늘날의 정치 사회적 문맥에 비추어 보아 "이것은 통치행위이므로 국익을 위해서 덮어 두자"는 말은 도도한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낯설고 이상한 중얼거림처럼 들린다.

여야 모두 진정으로 국익을 생각한다면 이 문제로 국가 전체를 장기적인 정쟁과 국론분열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지 말고 신속하게 법이 정한 절차와 방법에 따라 낱낱이 진상규명을 하고 책임문제를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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