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대회 때 나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친절했던 사람들을 한국에서 만났다.
주한 미 대사관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촌 동생, 나, 내 두 동생 등은 월드컵 경기가 열리던 한국의 여러 도시에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나 지하철을 자주 이용했었다.
우리는 몇 호선 지하철을 타야 할지 몰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부드럽게 우리에게 다가와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줬기 때문이다.
이곳 미국에서는 그같은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나는 슬프다.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낯선 사람 특히 외국인처럼 생긴 사람들을 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도와주려 하는 경우는 훨씬 더 적다.
3-4위전이 열린 남부 지방의 도시 대구에 우리가 늦게 도착했을 때 대구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대구는 아름다운 도시였고, 완벽할 정도로 깨끗했다.
길가에 널려져 있는 것이라곤 'Be the Reds'라 적힌 붉은 티 셔츠를 입은 수천 명의 팬들뿐이었다.
그들은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과 어우러져 도시 내에 하나의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이것들이 내가 대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다, 지금까지.
그런데 그러한 기억들이 지금 악몽으로 가려져 버렸다.
TV는 완전히 불타버린 지하철 전동차를 보여줬다.
불과 몇달 전 대구에서 똑 같은 전동차를 탔었지만 화면에 비친 그 전동차는 전혀 낯설었다.
나는 화면에 나타난 숫자를 보고 깜짝 놀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목요일 현재, 적어도 120명 사망, 136명 부상, 165명이 실종 신고됐으나 사고 잔해 현장을 둘러본 결과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대구의 길 밑에서 일어난 무고한 시민 수백명의 죽음에 나 역시 너무나도 슬프다.
내가 지난 여름 그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나를 마치 가족처럼 대해 줬었다.
그 탓에 한국을 떠난 후에도 나는 이따금씩 제2의 고향에 대한 향수병을 열병같이 앓곤 했었다.
그같은 끔찍한 일이 그같이 평화로운 시민들에게 일어났다는 것에 나는 너무도 슬프다.
희생자들이 화염과 유독 가스에 휩싸여 있을 때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위험에 빠져 있으며 가족들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한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참사 희생자들의 이야기와 유사한 눈물 겨운 이야기들도 들려 왔다.
이번 사건은 한국에서의 지하철 여행에 대한 기억을 영상처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지하철에 타고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있었다.
어떤 한국인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그냥 잡담을 나눴고, 어떤 한국인은 게임을 하고 있었으며, 또 어떤 한국인은 학교에 가는 동안 혹시 수업에 늦지는 않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그냥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곤 했다.
나라 전체가 북한의 위협으로 긴장하고 있는 사이 지하철 사고는 땅 속으로부터 한국인들의 발목을 잡아챘다.
마치 축구에서 상대방 선수가 악의적으로 뒤에서 비겁하게 슬라이딩 태클을 하는 것처럼.
나는 미국 정부와 다른 국가들이 하루 빨리 대구에 도움의 손길을 뻗치기를 희망하고 또 그렇게 할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한국 국민들과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동시에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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