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하는 오후

마른 나뭇잎 한 장에서는

아, 하고 바스러지는 한 컷의 시간이 만져진다.

수만 개의 나뭇잎을 매달고 있는 가문비나무 숲 속에 들어가면

아, 하고 바스러지는

수만 컷의 시간이 겹쳐져 있다

명암과, 정신의 높낮이로 읽어야 하는

사람의 아픈 몸 어디에도

아! 아! 으, 으, 소리치지 않는 곳이 없다

마음의 모든 현을 끊어버린다

다시는 바이올린을 듣지 않으리라

송종규 '흑백필름'

우울한 추억은 대개 흑백 필름으로 윤색된다.

처음 그것은 바이올린 선율처럼 도입부의 한 컷(마른 나뭇잎 한장)으로 촉발된다.

그 선율 따라 모든 협주음(수 만 개의 나뭇잎)이 뒤따르고 드디어 추억의 지층이 쌓여 있는 인간의 세포마다 악보가 되어 흐느끼게 되면서 시인은 마침내 바이올린 그 자체가 된다.

현을 끊고 귀를 막지만 이미 소리가 된 그 울림은 끝없이 허공 저편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권기호〈시인·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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