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역사가 시작된 이후 피만큼 생활과 가깝게 등장한 단어도 흔치 않다.
피가 가진 의미는 아주 다양할뿐더러, 신성과 부정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다.
긍정적 피의 개념으로는 희생, 신성, 맹세 등이 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여호와가 이집트인의 모든 맏아들을 제거할 때, 모세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여 재난을 피하도록 한다.
이 때의 피는 희생이다.
어린 양을 희생시켜 맏아들의 죽음을 대신케 한 것이다.
◆민간신앙에서는 피가 신성한 제물로 간주된다.
신에게 피를 바쳐 복속(服屬)을 맹세한다는 뜻으로 동물의 심장을 제단에 바치는 습속이 있어왔다.
우리의 굿판에서 돼지머리로 고사를 지내는 것 또한 신성의 한 표현이다.
돼지머리가 신성한 것이 아니라, 돼지의 피를 뿌리는 행위를 신성하게 보는 것이다.
통돼지를 바치는 것이 제의의 전형이겠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머리만 바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동양의 오행사상에서는 핏빛 즉 적색은 뜨거움과 열기 등 생명의 활력을 상징하는 남방과 연결된다.
그래서인지 중국 전래 풍습에서는 빨간 색이 귀신을 쫓는 색으로 간주된다.
무속에서 붉은 빛을 선호하는 것도 이 색깔이 신의 영험을 잘 드러낸다고 믿기 때문이다.
액막이인 동지 팥죽은 유감색(類感色) 물질로 피를 대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피는 정성과 맹세를 뜻하기도 한다.
옛 설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효자 효녀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위급한 어버이의 병을 고친다.
하늘에 정성이 닿도록 하는 행동이다.
자신의 결의나 결백 즉 맹세를 밝힐 때도 혈서를 쓴다.
피 즉 목숨을 걸고 다짐한다는 뜻이다.
각종 문서 작성 때 사용되는 인주(印朱)가 붉은 색인 것도 그것이 피의 대용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피는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지만, 월경 피만큼은 부정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중국에서는 월경 피를 묻히면 질병과 재난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 사회에서는 월경기간동안 여성의 집밖 출입을 금지시킨다.
남자가 월경 피에 접촉되지 않도록 같은 의자도 사용치 못하게 했다.
◆민주당 신당을 둘러싼 논의과정에서 신주류의 한 인사가 "선혈이 낭자하도록 운운…"의 말을 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판이 더럽고 험하고 위험한 3D업종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말로 먹고사는 정치인들이 주인인 국민들에게 해대는 언사가 참으로 난폭하다.
경제난, 취업난, 파업난, 교단갈등으로 마음 편할 날 없는 국민들에게 사과와 위로의 말은 못할 망정 이 무슨 해괴한 어법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잡초론이 나오게 된 이유를 알만하다.
박진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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