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을 모태로 가야천과 이천천의 맑은 물줄기가 모로 만나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경남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 같은 경상도 땅이지만 생활권을 놓고 따지면야 경남이랄 것도 없다.
그렇다고 경북일 수는 없는 그 곳에 월광사가 있다.
빛바랜 절이라기 보다는 역사와 깊숙이 맺어진 인연이 오히려 이름 값을 한다.
절 뜨락에는 오락가락 장맛비에도 처연히 서 있는 비(碑) 하나. 거기 빗돌 거죽에 가슴을 파고드는 노래가 있음이야. 아득한 풍경소리 어느 시절 무너지고/ 태자가 놀던 달빛 쌍탑위에 물이 들어/ 모듬내 맑은 물줄기 새 아침을 열었네/
대가야의 마지막 월광태자가 사라져 가는 왕국을 바라보며 한을 달랬다는 음률이다.
그 음률은 이미 역사가 되어 1천400년의 시공을 사뿐히 넘나들고 있었다.
그만큼 월광사는 망국의 아픔을 삭이기엔 더 없이 한적한 터였기에 오늘도 선남선녀들은 비석 앞에서 그 음률을 입안에 적시며 돌기둥을 이룬다.
음률은 새 나올 때 마다 탄식으로 바뀌고 탄식이 모두어 터지는 탄성 아! 대가야. 그런 대가야. 대가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전 같으면 가야 하면 으례껏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를 입에 올렸지만 이제는 다르다.
경북 고령을 중심으로 대가야가 떡 하니 버티고 있음에 사람들은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근래에 단장을 끝낸 고령읍내의 지산동 고분이 세상을 놀라게 한것도 관심을 끌게한 큰 몫이지만 여기에 경북도와 고령군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화집을 내고 정비를 하고 다듬은 덕분에 대가야는 점점 살아있는 모양새를 내고 있다.
그 뿐인가. 학자들은 저마다 활발한 대가야 연구로 탄탄한 학설들을 내놓기 바쁘다.
여기다 문화재연구모임들이 또 현장을 샅샅이 뒤지며 돌 하나 풀 한포기 놓치지 않고 있다.
금관가야에 어쩔수 없이 묻혀 오늘에 이른것에 대한 맺힘이 한꺼번에 풀리는 기분이다.
대가야를 알려는 질문들이 봇물을 이루고 대가야의 흔적을 찾아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고령을 찾는 고사리 손들에서 대가야는 또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일거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아무리 탈역사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대가야가 마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들만 전해 주는 옛 왕국으로만 생각한다.
굳이 그렇게 생각함을 마다할 필요는 없다.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도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풀어도 풀어도 영원히 못 풀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들이 더욱 대가야의 진면목을 말없이 대변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쳐버릴 그 수수께끼들.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마을 뒷산. 가야산 기슭이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산 속으로 200여m쯤 들어서자 잣 나무 두 그루가 받치고 있는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길이 15m 높이 7m의 거대한 이 바위는 30여년 전 까지만 해도 사람의 발길이 닿았단다.
이 마을 터줏대감 신덕수(72)씨는 "정월 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목욕재계 하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른바 대가야의 첫 왕을 잉태한 가야산 여신을 기렸던 정견모주(正見母主)의 제단이었다는 것. 여기서 1시간 남짓 더 오른 가야산 중턱, 서장대 주변에는 가야산성을 쌓는데 이용됐던 수천 수만개의 돌이 허물어져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성벽으로 남기엔 기나 긴 세월을 감당하기가 버거웠으리라. 동남쪽 능선을 100m쯤 오르자 큼지막한 돌들을 받침대로 삼은 길이 5m의 바위가 산 정상을 향해 누워 의연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마바위'. 혹은 '상아덤'으로도 불린다.
정견모주가 하늘신 '이비가(夷毘訶)'를 맞을 때 탔던 꽃가마였다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이 길목이 출입통제 지역으로 묶여 사람의 발길이 끊겨 있었다.
역사와는 상관없이 길이 통제된 것이 자못 아쉽기만 하다.
남쪽으로는 가야산에서는 가장 아름답다는 기암괴석을 보듬은 만물상 능선이 끝간데 없이 이어져 있고 운무마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지경으로 주위는 묘한 조화를 종일 부리고 있었다.
냅다 합천 쪽으로 다시 내달렸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미2리. 국도 옆 실개천의 자그마한 비석. 옛 대가야 지배층들이 대표성을 갖고 회의를 열었던 곳에 세워진 이 '가야비'도 주민들의 눈길 한번 받지 못한 채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 동네 하종달(57)씨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내력없는 그저 그런 비석으로만 여겨 별 관심이 없었지요. 나 뿐 아니라 주민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요?" 정말 얼빠진 대답이자 물음이었다.
그래도 비석에 새겨진 희미한 열넉자 글은 천년을 넘게 풍상을 이겨온 뚝심을 여지없이 내 보이고 있었다.
윗글은 힐끔 내다 본 대가야의 본 얼굴 중 한 점에 불과한 이야기들이다.
이렇듯 대가야는 분명히 앞서 말한 수수께끼 투성이 만은 아닐 것이다.
가야산을 어머니로 한 대왕(大王)의 나라. 우리가 여태껏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푸대접 했던 웅대한 대가야. 영광과 웅비의 흔적들에 출입이 통제되고 마냥 웅크리고 외면 받았던 대가야. 종종 승리의 역사만 역사인양 그 역사의 한 켠에 비켜서 있어야만 했던 대가야. 대가야가 살아 숨쉬고 있는 현장을 샅샅히 뒤지려 이 시리즈를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록만 가득하고 대가야는 단 몇 쪽이 할애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 고대사는 사국(四國)의 역사가 아니라 찢겨진 삼국의 역사만 남아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가야가 잊혀 진 것일까. 아니 잊혀 질까. 그럴리 없다.
대가야는 살아 있었다.
그냥 살아 있는게 아니라 살아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왕과 지배층의 무덤에서는 대국의 위용을 자랑하는 금(동)관과 자칫 굴왕신 같은 물건으로 치부되기 마련인 껴묻이(순장) 인골을 비롯해 토기, 갑옷과 투구, 세련된 농기구등이 쏟아지고 방어체계와 권력기반이 된 수 많은 산성터와 철산지가 착착 확인되고 있다.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여부를 가늠할 '부(部) 체제'와 대왕(大王)이라는 용어만 해도 그렇다.
경남 합천군 저포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대가야 양식의 토기에 하부(下部)란 글자가 발견돼 한때 사가들의 눈을 번쩍 뜨도록 한 일이 있었다.
또 있다.
'大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 긴 항아리에서 우리는 대가야가 안팎으로 대왕의 나라를 표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토기라면 대가야는 또 얼마나 눈부신 왕국이었나를 알 수 있다.
그 출현이 경남 합천, 거창, 함양, 산청, 의령, 진주, 하동, 함안, 고성과 전북 남원, 임실에 미쳤다.
최근에는 전북 장수, 진안과 전남 곡성, 구례, 광양, 여수에까지 확대되고 있어 학자들의 현장 발굴이 활발하다.
이처럼 전성기의 대가야 세력권은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 넘기에 충분하다.
중국의 사서 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479년 가라국(대가야)왕 하지가 남제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본국왕'이란 작호를 받았다"는 기록 말이다.
대가야가 당당한 왕국이었으며 이 밖에 일본과도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는 사실이 문헌을 통해서도 풍부하게 입증되고 있다.
이제 대가야를 당당하게 말 할 때가 됐다.
아니 너무 늦은 일이다.
가야산, 가야천, 가야금, 가야역, 가야대학교, 가야읍 등등. 고구려 대학교가 있는가, 백제산이 있는가, 신라역이 있는가 하물며 신라금이라는게 있는가? 그렇지만 가야는 그렇지 않다.
특히 대가야는 악성 우륵이 대가야 멸망 11년 전 신라로 귀화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악기는 어떻게 지금까지 신라금이 아닌 가야금이란 이름으로 남아 요즘도 한해만에 7천여대씩 팔리고 있을까. 철의 왕국으로 당당하게 세계화의 선진에 앞장 선 포스코의 힘과 기술도 그 뿌리를 찾으면 결국 대가야로 귀결지어질 수밖에 없질 않은가. 그런 대가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본다.
특별취재팀
글: 김병구.김인탁(고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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