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인생 30년을 넘긴 연극인 홍문종(56)씨. 처음 그를 만난 사람에게 연극 배우라고 소개하면 '그래요'라며 호기심의 눈길을 보내지만 '달구벌∼ 만평…'이라고 하면 '아하'라는 반가움이 금방 묻어난다.
매일 아침 8시 30분, MBC 라디오 표준 FM에 채널을 맞추면 어김없이 홍씨의 쾌활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콧소리가 묻어나는 비음섞인 특유의 목소리로 '높은신 분'들을 방앗간 절구처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달구벌 만평'. 올 10월이 되면 홍씨는 이 프로를 맡은 지 꼭 20년이 된다.
84년 CM을 합쳐 5분정도 되는 '달구벌 만평'을 맡은 이후 그는 한 차례의 '펑크'도 없이 이 프로를 진행해 오고 있다.
한 사람이 단일 프로를 20년 동안 진행하기는 홍씨가 처음일 것이라는 것이 방송계의 이야기.
장맛비가 잠깐 그친 오후 그를 만나 '달구벌 만평'의 뒷 얘기를 들어봤다.
"만평이 일년 내내 방송되니까 아마 20년 동안 등장한 인물이 수천명은 되겠죠. 예전이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가려운 곳을 대신 긁어주는 것이 '만평'의 가장 큰 매력 아닙니까".
대구MBC 개국 프로인 '달구벌 만평'은 쉽게 말해 높은 분들을 사정없이 씹는(?) 프로다.
보도국 기자들이 취재해온 관계나 정치계, 교육계와 경찰 등의 고위직 인사들의 발언을 성대 모사를 통해 인용한뒤 풍자적인 사족을 붙여 잘잘못을 꼬집는다.
달구벌 만평의 최고 '포인트'는 멘트 중간과 끝부분에 들어가는 웃음소리. 이 웃음속엔 '풍자의 미학'이 담겨 있다.
홍씨는 "뉴스와 만평이 틀린 것이 바로 웃음"이라며 "청취자가 통쾌함을 느끼고 여운과 뒤통수를 치는(?) 맛이 바로 웃음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헤헤'와 '하하'가 주는 의미가 틀리듯 홍씨는 만평속 웃음에는 긍정과 빈정, 그리고 청취자의 판단에 맡기는 묘한 뉘앙스의 웃음 등 3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는 "웃음이 주는 분위기가 참 묘하다"며 "한 목소리지만 듣는 사람마다 모두 다른 느낌을 갖는다"고 밝혔다.
삶의 경륜이 묻어있는 50대 중반의 홍씨. 20년 경력의 성우지만 그래도 방송에선 종종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단다.
홍씨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려고 하지만 사람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감정이 묻어난다"고 말한다.
평상시 홍씨의 목소리는 방송때와는 딴판이다.
약간의 저음을 빼면 특징이라곤 전혀 없다.
"방송 할때는 목을 강하게 죄고 비음을 약간 섞어야 해요. 그래야 의사전달이 명확하고 스피드 있게 진행할 수가 있죠". 그러나 이 목소리는 '상당한 고통'의 결과물이다.
"처음 몇년간은 적합한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길가면서도 연습을 하다 행인들과 부딪친 적이 많았다"는 것이 홍씨의 설명. 달구벌 만평 20년 동안 홍씨에게는 몇가지 생활 철칙이 생겼다.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소금물로 목을 씻어내는 것과 방송 펑크를 내지 않기 위해 2, 3일 이상 대구를 떠나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 덕에 지난 99년 한국방송대상 성우 부문 개인상까지 받은 홍씨에게 언제까지 '달구벌 만평'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욕심이야 목소리가 허용할때까지 하는 거죠".
선배 연극인이 진행하던 '달구벌 만평'에 대타로 잠깐 등장한 것이 인연이 돼 20년 동안 이 프로를 맡아온 홍씨는 "채 5분이 안되지만 내 목소리를 통해 청취자들에게 '청량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내 삶에 있어 큰 행운"이라고 했다.
한편 홍씨는 타고난 연극인이기도 하다.
무대 데뷔 초기인 75년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은 그는 83년부터는 대구연극협회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까지 출연한 연극만해도 250여편. 연기의 매력에 대해서 묻자 홍씨는 항상 인터뷰 마지막에 나오는 질문이라며 '달구벌 만평'식으로 톡 쏜뒤 "왕에서 거지까지 수많은 사람의 삶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달구벌 만평'을 통해 20년 동안 대구사회의 감초 역할을 해온 홍씨. 그는 오늘도 저녁 7시가 가까워지면 목을 추스르며 녹음실로 발길을 재촉한다.
이재협기자 ljh2000@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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