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를 호령하던 왕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안타깝게도 빈약한 문헌자료와 유물로 인해 여태 왕 이름이나 그 무덤조차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삼국사기'를 통해 1대 왕이 '이진아시왕', 마지막 왕이 '도설지왕'이란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 사서 '삼국사기' 고령군조에는 '대가야국은 시조 이진아시왕으로부터 도설지왕에 이르기까지 16대 520년간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밖에는 일부 문헌을 통해 영광을 남긴 3, 4명의 왕이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5세기 초 축조된 지산동 47호 고분의 주인공으로 전해지는 '금림왕'이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금림왕은 그 배경을 알기 어렵고, 단지 대가야가 세를 모으기 시작한 시점에 등장한 왕으로 꼽힌다.
대가야의 국제무대 등장을 알려주는 왕은 5세기 후반, '하지왕'이다.
이 왕은 479년 신라, 백제와는 별도로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본국왕'이란 작호를 받았다.
이는 중국 '남제서' 동남이전 가라국조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에 단독으로 사신을 보낸 외교력은 다른 가야세력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것으로, 대외관계에서의 대가야 위상을 잘 대변해 준다.
6세기 초, '가실왕'도 악성 우륵에게 가야금을 제작토록 하는 큰 족적을 남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가실왕이 중국의 쟁(箏)을 본 뒤 성열현 사람 우륵에게 12곡을 짓게 명했다'고 나와 있다.
'이뇌왕'은 6세기 중엽, 친백제적 대외관계에서 친신라 정책으로의 전환을 꾀한 왕으로 주목할 수 있다.
대외 교섭의 주요 항구인 다사진을 백제에 뺏긴 이 왕은 522년 신라 법흥왕에게 '혼인동맹' 체결을 제의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9년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 건치연혁조를 토대로, 법흥왕이 이뇌왕에게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을 시집 보냈고, 그 사이에서 '월광태자'가 태어난 사실을 알 수 있다.
대가야가 신라, 백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다양한 자구책을 모색했다는 것을 미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일부 사학자들은 중국에 사신을 보낸 하지왕과 가야금 제작을 지시한 가실왕을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고, 대가야의 마지막 도설지왕을 월광태자로 유추하지만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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