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 대가야(12)-사상과 신앙

'알터'. 다감하면서도 야릇한 이름이다.

그 이름 속에 천년을 훌쩍 넘어 전해지는 설화가 있을 줄이야. 그것도 대가야 왕의 탄생을 알리는 ….

대구에서 고령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목인 금산(망산)재에서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간 끝자락. 경북 고령읍 장기리 '알터'마을은 적림산으로도 불리는 금산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예전엔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 속했던 지역.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대가야의 전신인 변한 '반로국'의 초창기 국읍이기도 했던 곳이다.

적림산을 배후로 동네 앞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회천이 흐르고 있었다.

한 주민은 "주변 산기슭에 꿩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꿩알이 많아 동네 이름을 '알터'라고 불렀다"고 유래를 전했다.

그러나 향토사학가인 김도윤(80)씨는 색다른 얘기를 꺼냈다.

가야산 산신과 하늘 신이 감응해 두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이 가야산 줄기를 타고 하천으로 흘러 내렸다는 것. 그중 하나는 이 곳 회천에서 껍데기를 벗고 나와 대가야의 1대 이진아시왕이 됐고, 다른 하나는 낙동강을 타고 경남 김해까지 흘러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됐다는 것. 대가야의 국읍, 그리고 알을 깨고 나왔다는 초대 왕의 설화. 묘한 조화였다.

바로 이곳에 대가야 선조들이 그린 바위그림이 있었다.

이른바 '알터 암각화(岩刻畵)'. 길이 6m, 높이 3m의 암반에 갖가지 그림이 가득했다.

그 때 그림까지 그렸다니. 돌로 쪼았을까, 아니면 다른 도구로 긁어냈을까. 한사람이 그렸을까, 아니면 집단적 작업이 이뤄진 것일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뭘 나타낸 그림일까. 1700여년 전, 이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바위에는 겹둥근 무늬(同心圓)가 네 군데 눈에 띄었다.

또 네 개의 구획으로 구분된 직사각형 문양이 모두 17개 새겨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 사람 얼굴이나 귀신 가면, 또는 소머리 같은 형상이었다.

이 형상의 윗 부분과 좌우에는 털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서너 겹의 동심원은 타오르는 해를 상징했을 터. 태양, 즉 하늘 신을 섬기지 않았을까. 대가야의 건국신화에도 산신과 함께 하늘 신 '이비가(夷毗訶)'가 등장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얼굴 형상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을까. 대가야의 모태인 가야산은 일명 우두산(牛頭山)으로 불렸고, 가야산 산신제에서도 소를 제물로 바쳤다고 전해진다.

또 고령 지산동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호암미술관의 대가야 금관에도 소머리 모양 장식을 한 부속물이 4개 있다.

이와 연결시켜 볼 때 얼굴 형상은 소를 나타낸 신성한 제물이나 수호신으로 풀이할 수 있었다.

또 알터 암각화 주변의 개진면 일대에서는 돌로 세운 무덤인 고인돌도 다수 출토됐다.

88고속도로 고령 나들목을 빠져나와 야천(안림천)을 따라 고령읍 방향으로 4km쯤 간 쌍림면 안화리. 야천을 낀 산기슭에 암반이 나왔고, 여기에도 역시 겹둥근 무늬와 얼굴 형상의 바위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대가야인들은 이렇게 고령의 젖줄인 회천과 야천 연안에서 태양신, 산신, 소, 큰 돌(巨石) 등을 신성하게 여겨 숭배하며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삼한시대 '소도(蘇塗)'와 같았던 알터나 안화리의 바위그림 앞에서 읍락의 안녕과 농경사회의 풍요를 빌며 하천에 몸을 씻고 5월과 10월 계절제를 지냈던 것. 대가야 토속신앙의 한 단면이었다.

이같은 사상과 신앙의 끈은 일부에서 최근까지도 이어져 왔다.

가야산 기슭,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마을 뒷산으로 200m쯤 들어선 곳에 길이 15m, 높이 7m의 거대한 바위가 우뚝 서 있었다.

잣나무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이를 지탱했다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정월 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목욕재계하고 마을의 '풍요와 평화'를 기원하며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단다.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의 제단'이었던 것.

중국사서 '삼국지' 위서는 '변한은 진한과 뒤섞여 있고 성곽이 있으며 의복과 주거지가 진한과 같고 언어와 법속도 비슷하지만, 귀신에 제사 지내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변한의 후신인 가야세력의 제의나 농경의례가 진한의 후신인 신라와 차별성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보인 집단적 껴묻이(殉葬) 풍습. 한 무덤에 적게는 2, 3명, 많게는 30여명을 껴묻는 장례의례에서도 대가야인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영혼이 사라지지 않듯 삶과 죽음의 세계가 이어진다는 '계세(繼世)사상', '속세의 정치적 위계와 질서, 경제적 부는 피안으로 이어진다'는 인식 등이 깔려 있었던 것.

이같은 인식과 사상은 400년대 중반~500년 중반 사이 분기점을 맞는다.

400년대 중반 축조된 지산동 30호 무덤에서는 특이한 양상이 발견됐다.

그림을 새긴 바위를 깨 이 무덤의 덮개 돌로 사용한 흔적이 보인 것이다.

그들이 숭배하는 태양신이나 산신에 대해 제사를 지내던 곳에 바위그림을 새긴 터여서 이를 깼다는 것은 '신앙의 대상'을 파괴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기존 신앙을 부정하는 조짐이 나타난 것. 이후 500년대 중반 축조된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에서는 불교의 한 상징인 연꽃 문양이 나타나 대가야 신앙의 전환을 시사했다.

산과 돌과 물, 하늘과 태양을 숭배한 대가야인들. 자연에 대한 한없는 경외감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사진:경북 고령군 양전동 암각화. 청동기 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 앞에서 향토사학자 김도윤씨가 다양한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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