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한글 '수난 시대'

한 나라의 말과 글은 민족 문화의 정수이다.

그 나라 정신세계의 뿌리이며, 민족의 혼이기도 하다.

그 나라의 말과 글은 민족의 흥망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익히 보아 왔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세계가 부러워하고 그 우수성을 인정하는 한글을 가지고 있다.

이 지구상의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문자들은 대부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가감돼 완성됐다.

하지만 한글은 만들어진 과정부터 다른 문자들과는 변별된다.

창제자.창제 연월일 뿐 아니라 그 정신까지 명확한 경우로는 훈민정음이 '지구촌 유일의 문자'이기 때문이다.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가 평가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고, 문맹퇴치에 기여한 이에게 세종대왕상을 주고 있다.

한글은 '오늘날의 모든 문자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체계'(미국 하버드대 라이샤워 교수)를 갖췄으며,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알파벳을 발명했다'(네덜란드 라이센대 포스 교수)는 예찬을 받는 등 세계가 '위대한 지적 성취'로 꼽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오늘의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면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

우리 사회에는 국적 불명의 조어들이 판을 치고, 각종 광고와 제품 이름에 외국어가 범람하며, 인터넷을 통한 한글 파괴도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방송.영화.공연에도 저속한 말들이 넘쳐나기는 마찬가지다.

한글 표준어는 이제 외래어.은어.속어 등에 밀려 '사전이나 교과서에만 있다'는 탄식이 들릴 정도다.

▲심지어 정부가 집대성해 뜻을 풀이하고 용례를 다는 등 우리말에 관한 모든 정보와 지식을 담아 최근에 펴낸 '표준어국어대사전'마저 3천여개의 오류로 범벅되기도 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선진국들은 모국어 보호에 거국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인터넷 출현 이후 '영어 침략'으로부터 자국어를 보호하기 위해 인터넷 용어는 물론 외국상표.식음료 이름까지 프랑스어로 쓰자는 정부 주도의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내일은 557돌을 맞는 '한글날'이다.

이 날을 맞아 '한글의 위기와 세계화'를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린다.

한글문화연대는 한글날을 국경일로 다시 만들고, 한글 훼손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제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를 기리는 날'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는 느낌이다.

정부도 소홀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 언어 생활의 혼란은 가치관의 혼란에 빠지게 하고, 민족혼과 주체성을 흐리게 할 것은 뻔한 일이다.

한글 사랑은 곧 나라 사랑임을 깊이 깨달아야겠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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