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 대가야(22)-대동맥의 요충지 '에히메'

한반도 대가야와 왜 야마토 정권을 연결했던 대동맥,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지중해의 물살을 가르며 가다보면 중간쯤에서 구로시마(來島) 해협에 맞닿는다.

1천500여년 전 목선을 저어가다 한 숨 돌리기도 하고, 각종 물자를 주고받기도 했음직한 곳이다.

지금은 4km에 달하는 큰 다리가 해협 남쪽 시코쿠(四國) 지방과 북쪽 섬을 잇고 있다.

대동맥의 중앙에 자리한 중간기지인 셈이다.

대가야는 구로시마 해협을 둘러싸고 있는 시코쿠의 서북쪽 에히메(愛媛)현에 상당량의 토기를 뿌려놓았다.

특히 에히메현 이마바리(今治)시, 마쓰야마(松山)시, 오치(越智)군, 히가시우와(東宇和)군 등에 유물이 집중돼 있다.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100여년 동안 대가야와 왜가 인연을 맺었던 규슈, 시코쿠, 혼슈지방 중 가장 집중적인 교류가 이뤄졌던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300년대 금관가야(김해)가, 400년대 전반 아라가야(함안)가 거쳐가며 뚫었던 루트를 400년대 중반 이후 대가야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가야제국의 중심세력으로 우뚝 선 대가야가 왜와의 교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시점이다.

구로시마 해협의 큰 다리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야트막한 산 아래에는 지금도 끊임없이 배가 드나들고 있었다.

구로시마 해협에서 불과 4km 남짓한 이마바리시 석추산(石鎚山) 구릉지의 '가라코다이(唐子臺) 유적지'. 이 지역의 고대 역사와 유래는 뚜렷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라'라는 발음에는 관심이 쏠렸다.

가야제국 중 '가라'로 칭해졌던 나라는 대가야와 금관가야뿐이었기 때문이다.

동행한 에히메대학 매장문화재 조사실의 미요시 히데미츠(三吉秀充)씨는 "왜와 교역한 가야인들의 후손이 정착한 곳으로 전해진다"고 했다.

이 유적지에서는 400년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대가야 굽다리 접시 2점과 백제 목 짧은 항아리 1점이 나왔다.

가라코다이에 인접한 오치군의 자그만 지역, 아사구라(朝倉)촌 '기노모토(樹之本) 고분'. 산 구릉지의 끝 지점에 쌓은 이 무덤은 현재 주변 지형이 동네 들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일부 시굴조사만 한 무덤에서 고령 지산동 32호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같은 모양의 목 긴 항아리(長頸壺)가 나왔다.

목 부분에 물결무늬가 세 겹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대가야 토기였다.

대가야 항아리 대다수는 가마 속에 구울 때 흠집이 나거나 금이 가지 않도록 풀잎으로 받쳤는데, 이 장경호의 밑바닥에 풀잎 자국이 선명했다.

이 항아리를 보관하고 있는 에히메 매장문화재조사센터의 오카다 도시히코(岡田敏彦) 조사1계장은 "무덤을 쌓은 시기로 볼 때 400년대 중반 대가야 양식 토기가 에히메의 신흥세력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기노모토 고분 바로 남쪽에 위치한 오치군 아사구라(朝倉)촌의 '조카다니(城 谷) 유적'에서도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有蓋高杯)와 목 짧은 항아리가 1점씩 나왔다.

굽다리 접시는 젖꼭지(乳頭) 모양 뚜껑과 바늘 무늬(針線紋), 뚫린 창(透窓) 등이 오롯이 남아 대가야의 고령토기가 분명했다.

목 짧은 항아리는 대가야 양식이면서도 물결 무늬가 없고, 바닥 밑면에 풀잎 자국이 없어 고령보다는 대가야의 영향권에 있던 타 지역(진주 또는 산청)에서 만든 토기로 여겨졌다.

구보타 도시코(窪田利子) 아사구라촌 향토미술고분관 학예원은 "500년대 초반 또는 중반에 대가야에서 온 접시와 항아리로 보인다"고 말했다.

구로시마 해협의 남쪽에 인접한 가라코다이, 기노모토, 조까다니 유적과 달리 해협 북쪽 섬에서도 대가야 양식의 유물이 나와 대가야의 목선이 이 해협을 통과했던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요시우미(吉海)정 야와타산의 '도조(東 ) 고분'에서 경남 합천 저포리 D지구에서 나온 것과 물결 무늬가 흡사한 목 긴 항아리가 채집된 것이다.

야노 토오루(矢野豁) 요시우미정 향토문화센터 소장은 "500년대 중반 무덤에서 이 항아리가 대가야에서 전해졌다는 것을 사학자들을 통해 수년 만에 알게 됐다"고 말했다.

마쓰야마시의 동쪽 오노지구의 지름 50여m의 대형 무덤, '관논야마 고분'. 여기서도 제작시점이 40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목 긴 항아리가 나왔다.

항아리 아가리의 뚜껑받이와 물결무늬로 대가야 토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쓰야마 고고관 관계자는 이 무덤을 도굴한 주민의 한 자손이 유물 채집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힌 뒤 유물을 맡겨왔다고 전했다.

마쓰야마 고고관 취재 중 낯선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고고관에서 고대 유물을 복원하는 1층 작업실에 학생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오노지구의 중학생 20여명이 문화체험 견학을 온 것이었다.

유물 복원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훼손된 토기나 장신구를 붙이고 손질하는 모습을 학생들에게 직접 보여주면서 옛 유물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역사 인식을 심어주기 위함이리라.

구로시마 해협에서 상당히 떨어진 에히메의 서남쪽 히가시우와군 우와(宇和)정 '이세야마 오츠카 고분'. 내부는 가로로 통로를 낸 횡혈식(橫穴式) 돌방(石室)이었다.

500년대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목 짧은 항아리(短頸壺)가 채집됐다.

우와정 역사민속자료관에 보관된 이 항아리는 아가리가 퍼졌고, 목선에 물결무늬가 있는데다 몸통에 X자형 무늬가 있어 대가야 양식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가키 구니히로(高木邦宏) 우와정사무소 사회교육과 주사는 "현재 측량조사만 한 상태며 조만간 발굴할 경우 한반도 양식의 고대 유물이 더 많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처럼 일본열도, 그 중에서도 세토나이카이의 중간기지인 구로시마 해협을 중심으로 에히메현 곳곳에 대가야 유물이 출토되고 있었다.

더욱이 정식 발굴조사가 아니라 도굴이나 채집을 통해 상당량이 나왔다는 점에서 향후 시굴이나 발굴을 통해 대가야와 왜의 정치.문화적 관계를 규명할 단서들이 속출할 것으로 보인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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