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쪽방 찾은 '산타'

"춥고 몸도 아프지만 의사 선생님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찾아주시니 마음만은 푸근하네요".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밤. 대구 남구 서부정류장 인근 쪽방에는 오랜만에 '사람사는 향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거리에 퍼지는 캐럴이 낯설기만 했던 날품팔이 행상과 노숙자, 그리고 품을 팔아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일용근로자들에게 예상치 않은 '산타'가 찾아 왔기 때문이다.

대구쪽방상담소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24일 밤 남구 대명11동 서부정류장 인근 골목길의 여인숙들을 돌며 외로운 이웃에게 의료진료 및 상담활동을 펼친 것. 시민들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이날 오후 8시 하나 둘 모여든 봉사단원들은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들이 첫번째로 들어선 관문시장 내 한 여인숙. 50대중반의 아주머니는 "의사선생님이 청진기 한번 갖다 대니 아픈 것이 낫는 것 같다"며 "성탄절 전야에 가족들과 보내지 않고 나를 찾아준 것 만으로도 너무 큰 성탄 선물을 받은 느낌"이라 말했다.

야채 행상을 하며 돈을 아끼려 길바닥에서 잔 적도 있다고 한 이 아주머니는 가족과 떨어져 홀로 지내며 갖은 풍상을 겪은 탓인지 나이보다 무척 늙어 보였지만 내내 얼굴에서 웃음을 놓지 않았다.

또 다른 여인숙에서 만난 송모(50)씨는 "나이 많다고 몇개월간 일도 못 나가 며칠동안 라면으로 때우는데 월세가 밀려 주인이 나가라고 재촉해 걱정"이라면서도 "이렇게 누추한 곳에 힘든 걸음을 해 준 봉사자들이 고맙다"고 말했다.

대구쪽방상담소 장민철 간사는 "성탄절 전야의 쪽방생활자 진료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힘들고 지친 생활속에서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이들이지만 조금이라도 힘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고 했다.

한편 이날 진료에 참여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2명은 "정기 의료봉사가 이번에는 크리스마스 전야가 된 것일 뿐"이라며 한사코 취재를 하지 말아 줄 것을 부탁했다.

트리나 캐럴은 없었지만 이날 밤 '쪽방'은 외롭지만은 않아 보였다.

문현구기자 brand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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