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로 들리는 딸아이들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씩씩댄다.
제 엄마와 또 의견대립이 있었던 모양이다.
큰 놈의 하소연 사이로 작은 놈의 쫑알거림도 무시로 들리는 걸 보니 자기들 깐에는 무언가 단단히 억울한 일이 있었던 낌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은 한 가지다.
두서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정리해 준 뒤, 책임소재를 아이들과 아내에게 적절히 분속시키고는 문제에 대한 최종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아내에겐 어떤 구속력도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아니 구속력은커녕 애들 버릇 다 망쳐놓는다는 핀잔만 줄곧 들으면서도 내가 이 막중한 심판관 역할을 기꺼이 즐기는 이유는, 이 때가 세 여자들 틈에서 그나마 내가 가장의 권위를 만끽하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편에서 보면, 그런 즐거움 뒤에는 모종의 불안감(?)도 잠재되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날 저녁 집에 들어갔을 때 언제 그랬냐싶게 다시 재잘대고 있는 세 여자를 볼 때 그 불안감은 특히 요동친다.
저들의 저 끈끈한 동물적 연대의식을 알량한 나의 합리성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함을 느끼면서, 이러다 애들과 아내 사이에서 나만 외톨이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 그 불안감의 정체이다.
최근 헌법재판소가 한 생물학 전공교수에게 호주제의 존립근거인 부계혈통주의의 과학적 근거에 대해 자문을 구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라는 저간의 뉴스는 그런 심리적 불안감을 충분히 증폭시키고도 남는다.
그 교수의 결론인즉, 생물학적으로 볼 때 암컷이 수컷보다 진화에 기여하는 바가 크므로 호주제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과 이동경로를 추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미토콘드리아는 모계로부터만 유전된다는 정도는 이미 과학적인 상식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이는 물론 새삼스런 뉴스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식이 남자들에게는 별로 유쾌한 상식이 아닌 것도 사실임을 어쩌랴.
그런데 인간사회에서 남성의 존재가치는 성적 역할과 식량조달과 전쟁수행, 이 세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류학자들의 설명을 듣다보면 불안감은 한층 더 심각해진다.
그 불안감은 남성의 존재이유가 고작 이 셋밖에 안 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작 그 가운데 둘은 이제 더 이상 남성의 고유한 활동영역이 아니라는 데 있다.
솔직히 말해보자. 자식새끼 데리고 살아가는 데 남자와 여자 가운데 누가 더 악착같은가 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뒷짐지고 헛기침만 해댈 때부터 이미 판가름난 문제가 아닌가.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요즘도 갖가지 남성중심주의적인 논리로 여성들의 취업시장 진입을 직간접적으로 가로막아 놓은 통에 여성의 경제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지 경쟁만 공정하다면 여자들 당해내기가 그리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쯤은 남성들 모두가 인정하는 일 아닌가. 전쟁 또한 그렇다.
백병전이 아니라 전자전으로 승패가 결정나버리는 현대전에서 수컷의 단순한 물리력은 갈수록 설자리를 잃어 가리라는 점 역시 불을 보듯 뻔한 까닭이다.
이렇게 보면 남성들에게 남아있는 불가침적인 고유영역은 이제 성적 역할밖에 없을 터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게 또한 간단치 않다.
성의 고유기능인 종족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유감스럽게도 생물학적으로 남성은 명백히 과잉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면 시쳇말로 소수의 '얼짱'만 제대로 사육시켜 필요할 때마다 쓰고 식량만 축내는 나머지 수컷들은 처분해 버리자고 하는 프로젝트가, 미래 어느 날 그럴 힘을 충분히 갖춘 암컷들에 의해 추진되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정자은행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현실에서 이게 여전히 뜬금없는 소리기만 할까.
인간의 본질은 '자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문화'에 있으며, 따라서 호주제 역시 그런 생물학적 잣대로 존폐가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고 짐짓 태연해 하면서도, 공상의 꼬리가 여기까지 미치다보면 이래저래 불안감은 커져만 갈 뿐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그동안 그런 문화적 질서를 짐짓 자연적 질서로 얼버무리는 일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며 그 혜택에 무임승차해 온 대가라면 부득불 감수할 수밖에.
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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