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기 (26)-속리산 종주(12)

12. 부록

임제의 호가 외갓집 앞을 흐르는 섬진강 지류인 백호를 따서 지었다고 했죠. 얼마나 그 어린 시절이 가슴에 남았으면. 호는 그 분의 철학과 인생관, 풍류가 담겨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씰데없이 아는대로 기억나는대로 모았습니다. 한국을 '풍류공화국'으로 만들기를 기원하면서. 풍류남아 이헌태가 드리는 이 시대 마지막 고언.

1) 고려불교를 다시 일으키신 분이 바로 보조국사 지눌이죠. 호는 목우자(牧牛者). 남들이 보면 목장주인으로 알겠어요. 그런 게 아니고요. 소치는 사람, 즉 지혜의 소, 진심의 소를 가꾸고 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십우도를 생각하시면.

보조국사는 당시 타락한 불교와 정치를 벗어나기 위해 도반을 규합시켜 '정혜결사' 운동을 일으키신 분이죠. "우리는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결사를 만들어 항상 선정을 익히고 아울러 지혜를 닦기에 힘써--- 심성을 수양하여 한평생을 구속 없이 지내고 달사와 진인의 높은 수행을 따르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라면서.

2) 이조때 정철과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으로 알려진 노계 박인로 선생. 늙어서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 노계곡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노계라는 호를 사용했죠. 그전까지 쓰는 '무하옹(無何翁)'이 인상적이더라구요. 세상 물정에 어두워 무엇을 할 줄 모르는 늙은이. 솔직히 '무능력한 노인'이라는 뜻이거든요. 이헌태하고 똑 같은 분 같은데. 글도 너무 너무 잘 쓰고 멋있긴 한데 너무 무능력하니 몸이 고생했죠.

눈물 없이는 못 듣는 대목. 그의 작품 '누항사' 의 일부. 농사 짓는 소를 빌리러 옆집에 갔다가 서럽게 거절당한 후 나오면서 쓴. "---- 헌 갓을 숙여 쓰고 뒤축 없는 짚신에 설피 설피 물러나오니 풍채 적은 형용을 보고 개가 짖을 뿐이로다".

개한테 쫒겨 나는 조선 제일의 문장가. 우째 눈물 없이 이 슬픈 사연을 듣고 있겠습니까. 역시 '무하옹' 올시다. 진주 이슬 같은 노계 문집은 최옥의 손을 거쳐서 1832년에 편찬되어 세상에 빛을 보죠. 최옥은 경주유림 출신으로 동학창시자 최제우의 아버지죠. 최제우가 그래서 박인로의 한을 풀자고 나섰나.

이헌태야, 세상이 험하고 거치니 이 악물고 다부지게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가난하게 살아 서 몸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게된다. 결국 마음까지 고생한다. 인정 사정 보지 말고 무조건 독하게 살아라. 저 자신이 그렇게 마음 먹어도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남의 사정 다 봐 주고 살다가는 내가 쪽박찰 것이란 생각이 뇌리를 때리면서도 또 반대편에는 브레히트의 시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 강하게 반발을 하거든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또 저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 있지요. 굴원과 묵자. 두 사람은 세상이 더럽더라도, 세상이 문제가 많더라도 '나 혼자만' 이라고 굳세게 나가자고 열변을 토했죠. 이 두 사람 따라 했다가는 얼마나 고독하고 힘드는 것인데. 이헌태 약하게 만드네. 근본적인 질문 하나. 이 험한 세상을 만나, 착하게 살면서도 잘 먹고 사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의문이 듭니다.

굴원.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귀양가면서 어부에게 글 한 수 남기죠. " 세상이 온통 다 흐렸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뭇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는지라. 그리하여 추방을 당하게 되었소" 또 "내가 들으니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고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고 하였소. 어떻게 맑고 깨끗한 몸으로 외물의 더러운 것을 받을 수 있겠소".

이에 어부가 말하기를 " 창랑의 물이 맑거든 그 물로 나의 갓끈을 씻는 것이 좋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거기에 나의 발을 씻는 것이 좋으리라". 이 굴원은 나중에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유배를 떠나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하네요. 아, 슬프다.

묵자. 성현 이름 가운데 가장 성의 없게 지었더라구요. 도토리 묵을 좋아해서는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밥묵자도 아니지요. 묵가의 대표적 인물인 묵자(墨子, 약 BC480~BC420). 묵자학설의 핵심은 엄격한 법질서를 강조하면서 "겸애(兼愛)". 다른 사람과 자기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으로 사회평등으로 이어지고 결국 전쟁도 막을 수 있다는 진짜로 쌈빡한 논리. 남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세계에 남이란 없다는 게 묵자의 메시지. 와, 대단해요.

묵자의 '귀의편'. 묵자가 평생토록 세상을 근심하고 개탄하여 의로운 실천에 주력하자 친구가 " 현재 온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의로운 일을 하기 싫어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괴롭게 이와 같이 힘을 다하는가. 권하건데 그대도 그만 두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에 묵자는 " 가령 여기 열 사람의 아들을 가진 사람이 있어 아홉 아들이 먹기만 좋아하고 게으르며 다만 한 아들만 부지런히 땅을 간다고 하자 먹을 사람은 그와 같이 많고 일하는 사람은 적은 터이므로 한사람만이라도 더욱더 노력하여 땅을 갈아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의로운 일을 하기 싫어하는 판이니 그대는 나에게 더욱 노력하기를 권해야 마땅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도리어 나에게 그만두라고 권한단 말이냐."

하나 더. 묵자 '법의편'. 묵자왈, "세상의 모든 나라는 하느님의 고을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어린이든 어른이든 귀하든 천하든 모두 하느님의 신하이다" 묵자님, 대단해요.

묵자 말씀 하나 더. "모든 사람이 상대방을 사랑하면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지 않는다. 부자(富者)는 빈자(貧者)를 짓밟지 않는다. 귀인은 천인을 압박하지 않는다. 지자(智者)는 우자(愚者)를 속이지 않는다. 이렇듯 천하가 강탈과 원한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상대방을 사랑할 일이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왜 파업이 , 왜 전쟁이 일어나겠습니다. 이 시대에는 묵자가 다시 나타나소서.

지상에서 낙원을 건설하려 했던 묵자는 단순한 사상가를 넘어서 실천가였죠. 그를 따르는 자로서 '불을 밟거나 칼날 위에 설 수도 있으며 죽어도 발꿈치를 돌리지 않는 제자'만도 180명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목숨 건 똘마니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구만요. 거의 조폭대장수준이구만. 그만큼 대단한 분이라는 증거죠. 이런 '행동하는 양심' 이 바로 이 시대에도 필요한데.

맹자도 '진심장구상'라는 글에서 "묵자는 인간을 널리 사랑하였고 이마가 닳고 발꿈치가 벗겨지도록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을 했다". 그렇게나 많이. 맹자가 말했으니 거짓말은 아니겠지. 이마가 닳고 발꿈치가 벗겨지도록 천하를 이롭게 하는 사람은 지금 전 세계를 둘러 과연 몇 사람이 될까.

"남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묵자의 말씀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보다 더 먼저 나왔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별로 없더라구요.

묵가와 유가의 차이를 끝으로 땡. 여러가지 차이 가운데 하나. 모 검색사이트를 보니 , "묵자는 유가와 다르게 鬼의 존재를 인정했다. 유가는 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제사와 같은 禮를 중시하는 모순을 범한 반면, 묵가는 鬼와 神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제사와 같은 禮를 낭비로 생각하고 부정했다. 즉 鬼에 대한 인정은 백성들이 겸애의 도를 실행하기 위해 여러가지 종교적 정치적인 제재를 도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3) 고려 천재 문인 이규보. 당시 집권 세력인 무인 최충헌에게 벼슬을 구하는 시를 바쳐 어용문인 소리 듣기도 했지만 그래도 고통 받는 농민을 걱정하는 시도 많이 남겼던 분이죠. 잘 나가시는 분들가운데 5,6공출신 인물이란 비판이 불현듯 떠오르네요. 재주있고 학덕있는 분들이 순수하게 사는 게 어렵구만. 이규보는 '동명왕편' 이란 民族 서사시도 남겼고. 최근 고구려사논쟁을 보면서 또 생각나는 인물이죠.

이분의 아호가 '백운거사'죠. 이외에 의미 깊은 이름을 많이 사용했더라구요. 지지헌(止 止 軒). 주역의 고귀한 말씀, '능히 그칠 바를 알아 그친다'. 송도 동쪽 수십 간의 초당을 짓고 살 때 붙힌 당호라고 하네요.

또 '삼혹호선생 '( 三 酷 好)도 있더라구요. 시 술 거문고를 좋아한다고 해서. 좋은 거 다 하셨구만. 그러나 옛 분들은 풍류와 낭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현대인들도 배웁시다. 자기 호나 자기 집이름을 멋있게 지읍시다. 그래서 그분이 똑 기억에 남도록. 명함에 이메일 주소를 적어 둘 것이 아니라 이런 호를 하나씩 적어둡시다.

백운거사의 백운에 대해 그는 '백운거사 어록'에서 "백운은 내 그리워하는 바이다. 그리워하면서 배우면 그 실(實)은 얻지 못하더라도 아마 그 가까이는 갈 수 있으니 구름이란 용용(溶溶)하고 한가롭고 산에 걸리지 않고 매이지 않고 표표히 떠나가며 형적이 구애 받는 바 없다. 경각에 변화하여 끝간 줄 모르고 유연히 퍼져 군자의 나옴과 같고 엄연히 거두어 고인(高人)의 숨음과 같다. 그 흰 것을 지키고 오묘한 이치를 깨우친다. 또한 거사란 집에 있어 도를 즐기는 자다". 참 멋지다.

벡운이 나온 김에. 작년 12월 13일 종정을 지내신 서옹 스님은 임종게, 열반송을 통해 "운문의 해는 긴데 이르는 사람 없고/ 백운 산정에 눈이 분분하네 / 한번 백학이 나니 천년동안 고요하고 / 솔솔 부는 솔바람 붉은 노을을 보낸다"

풍류가 나온 김에. 풍류도란 말은 신라 최치원이 쓴 '국유현묘지도일풍류" (國有玄妙之道曰風流')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박희진 시인이 잠언풍의 시 형식으로 쓴 '풍류도 선언' 가운데. " 1) 천-지- 인 3재의 균형과 조화 그것이 풍류도다 2) 풍류도의 근원은 단군성조이고 극치는 화랑도 3) 풍류도를 달리 말하자면 대자연교라 할 수 있으리 4) 풍류도가 낳은 가장 위대한 학자 시인이자 도인이 최치원 5) 유불도 삼교도 대자연 품속에선 풍류 하나로 녹아들수 밖에 6) 왜 이 강산은 도인의 나라인가? 풍류도가 있기 때문 7) 왜 이 나라에 풍류도가 생겼는가 ? 강산이 더없이 오묘한 때문 8) 이 땅에 태어나서 풍류도 모른다면 무슨 보람 있으리오 ? 9) 풍류도야말로 공해로 죽어 가는 지구촌 살리는 길 10) 풍류도가 행해져야 음양오행이 제대로 돌아간다."

4) 국보 180호 '세한도'를 그린 조선후기 최대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의 아호 '완당(阮堂)'은 쬐금 기분이 좋지가 않더라구요. 당시 중국 청나라 연경학파의 대표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옹방강 (그는 김정희를 해동제일이라고 칭송)과 완원.

완원과 사제지간을 맺고 존경하다 못해 호를 완당으로까지 이름지었다고 하네요. 나쁘게 얘기하면 사대주의의 극치죠. 반면, 옹방강은 소동파의 후계라고 자처했다고 해요. 옹방강은 소동파를 보배롭게 모신다고 하면서 그 서재를 '보소재'라고 했다고 해요. 소동파는 나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김정희 선생님이 그 중국 분을 사모한다고 해서 호까지 그렇게 할 필요가.

추사의 호는 100여가지. 늙은 과일의 '노과'도 있고 '보담재'도 있어요. 스승인 담계(覃 溪) 옹방강을 보배롭게 생각한다는 뜻에서. 나 원 참, 이것이 당시로서는 요즘과 같은 '국제화, 세계화'인가.

나온 김에 추사 김정희의 비애국적인 발언도 곁들여 소개합니다. 이헌태는 한 인물을 평가할 때 장점도 많이 거론하지만 기자출신이라서 잘근잘근 씹는 성질이 어디 가겠습니까.딱 걸리면 아주 작살을 내죠. 공자든 누구든. 히히 농담요. 다 들 훌륭하신 분들이죠.

당시 중국문인 '조강'의 글에 따르면 " 동쪽 나라에 김정희 선생이 있는데--- 심히 중국을 그리워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조선에는 사귈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고 외교사절을 따라 청나라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추사 스스로도 중국 문화에 매료되어 "동인(조선사람)은 이 이치를 모른다" 또는 "동인은 참으로 한심하기도 하다"라고 힐난했다고 하네요. 시에서도 "내 고향은 미개한 땅 진실로 촌스러워 중원 땅 선비들과 사귀기 부끄럽네" . 으 웩. 지금으로 따지만 '열렬한 친미주의자'쯤 되겠죠. 우찌 되었든, 좋은 점만 보고 삽시다.

족보 좋아하시는 분 많으시죠. 이헌태도 남들이 전혀 인정해주지 않고 있지만 그것도 10000%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한국의 '현대판 소동파 '로 자처하고 있죠. 취향에 맞는 분들은 '생활의 발견'의 임어당, 홍길동의 허균, 연암 박지원등등.

주자 아세죠. 조선시대 조선사람들이 하늘처럼 떠 받들었던, 오랜기간 동아시아를 풍미했던 주희. 이분이 도학의 전통을 '요 순 우 탕 文 武 고요 이윤 부열 주공 소공 공자 안회 증삼 자사 맹자 정호 정이 정씨형제 그리고 자신으로 전승되었다'고 제시했더라구요. 나 원 참. 유가(儒家)왕조을 만들었다고요. 여느 왕조는 오래 못 가지만 이 왕조는 5천년이상 지속되었고 (요순까지 따지면 까마득하구만) 지금까지 나라 건너 한국의 시골 양반노인님네들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세계 최장 왕조'로 임명합니다.

5) 우리나라 최초의 야담집인 '어우야담' (於宇野譚)'. 조선 중후기 야담, 설화문학의 대가인 유몽인(1559-1623)이 지었죠. 유몽인의 호가 '어우당 (堂)' 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쓸데없는 소리로 뭇 사람을 현혹시킨다 '(於 宇 以 蓋 衆) 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스스로 낮춘 거죠. 결국 점잖 빼는 양반님네들 눈에는 풍자와 해학이 눈에 가시 같은 헛소리꾼으로 들렸겠지요. 결국 인조반정이후 아들과 함께 무고죄로 사사되었습니다. 이헌태도 몸조심해야지. 이헌태도 자칭 혹세무민하는 '헛소리꾼'인데. 전에 그랬죠. 이헌태의 혹세무민은 혹독한 세상을 만난 백성을 위무한다고.

6) 윤선도의 호는 해옹(海 翁),. 바다의 노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와 비슷하구먼. 윤선도의 사랑채 녹우당(綠雨堂)은 효종이 윤선도에게 선사한 것이라고 하는데. 녹우당, 나뭇잎새가 내는 빗소리를 듣는다. 너무 좋다.

7) 조선 중중때 송순 선생의 정자가 '면앙정(免仰亭)'. '땅을 내려다봐도 또 하늘을 올려다봐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꿈꾼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윤동주 시인 보다 앞 선 분이네요. 그분은 60살 때 그 정자를 증축한 뒤 "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땅을 내려다보기도 하며 바람을 쐬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본래 원하던 바가 이제야 이루어졌닥" 며 너무 기뻐했다고 하네요. 이게 진짜 기쁨인데, 장관 되었다고 기뻐하고 국영기업체사장되었다고 기뻐하고, 국회의원 되었다고 기뻐하고.

전담 담양에 머물며 지은 시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어 나 한칸 달 한칸 청풍한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이처럼 송순은 면앙정을 짓고 스스로 '면앙정가(歌)'를 부르고 기대승에게 '명앙정기(記)'를, 김인후와 박순에게 '명앙정영(詠)'을 얻고 28청년인 임제에게 '면앙정부(賦)'를 청탁했다고 하네요. 앞에서 열거된 분들이 누구인줄 아세요. 둥둥둥. 요즘으로 치면 호남문단의 대표적 인물들이죠.

아시죠, 예전에는 문장가가 시인이고 공무원이고 정치인이고 권력자였던 사실. 그래서 대권력자가 대문장가였죠. 하나로 통합되었었죠. 지금은 다 뿔뿔이 분화되었죠. 어떤 것이 좋은가. 정답. 너무 분화되면 안 좋죠. 대통령도 멋드러지게 시 한 수 쓸 수 알아야죠. 다음 대통령 선거때는 문 (文),사(史),철(哲) 테스트도 합시다. 아니먼 그만이고.

뱀 다리. 이조시대때 경상도 지방에서는 지조 곧고 강직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비해 전라도에서는 풍류와 멋을 아는 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네요. 각 도별 대표선수로는 경상도는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조식 정구 유성룡. 전라도는 송순 김인후 정철 임제 윤선도. 고려말, 조선에 투항하지 않은 야은 길재는 선산 금오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영천 출신의 포은 정몽주도 죽음으로 '충신 불사이군'을 지켰죠. 사실 야은과 포은이 경상도의 지사적 기질의 텃밭이 되었다고 봐야하겠죠.

비슷한 얘기지만, 일전에 모 일간지에 영호남 명문가에 대한 연재물이 실렸죠. 그때 영호남의 명문가들을 분석해보니, 영남의 명문가들은 권력자들이 지녀야 할 강직과 청렴에 대한 일화가 많았고 호남의 명문가들은 재력가들이 지녀야 할 적선 (積善)과 분배에 대한 미담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네요.

근, 현대에 들어와서 특히 일제 해방후에는 경상도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전라도는 민주화의 성지로 각각 자리를 매김했죠. 영호남 지역민들 여러분, 이제 서로 서로 공을 인정하고 나라를 위해 힘을 합쳐 세계를 향해 다시 한번 도약해 봅시다. 전라도 만세, 경상도 만세, 충청도 만세, 경기도 만세, 강원도 만세, 제주도 만세, 우리 국민 모두 만세. 이헌태 만세. 뭐야.

8) 멋진 호, 멋진 이름은 이외에도 수두룩하죠. 서울시내 고서화전문 화랑인 학고재 (學古齋). 그림과 글씨에서 옛 것을 배운다는 뜻. 월농정 (月弄亭). 달을 희롱하면서 즐기겠다는 뜻.

인터넷 모 검색사이트에 나온 선조 10분의 호를 소개합니다. (1) 정약용 茶山(다산) - 강진에 유배 가 있을 때 주변에 차 밭이 많아서 붙인 호. (2) 이황 退溪(퇴계) - 살던 곳을 흐르던 개울 이름에서 땀. (3) 이이 栗谷(율곡) – 거주했던 파주시 마을 이름, 밤이 많은 밤골에서 땀.

(4) 정여창 一蠹 (일두) - 한 마리의 벌레, 좀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낮춤. (5) 정몽주 圃隱(포은) - 채마밭에 숨어 농사나 짓겠다는 뜻으로 조선의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냄. (6) 이색 牧隱(목은) - 목부로 소나 양을 치면서 살겠다는 뜻. (7) 길재 冶隱(야은) - 물무질하며 대장간에서 살겠다는 뜻. 위 세 분은 고려말 학자로 '여말 삼은' 이라 함.

(8) 권벽 習齋(습재) - 논어 첫머리의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에서 딴 호로 학문을 익힌다는 뜻이며 이런 齋 堂 軒 庵 菴 등으로 끝나는 호를 堂號(당호)라고 함. (9) 남사고 格菴(격암) - 格物致知(격물치지)에서 딴 당호. (10) 곽재우 忘憂堂(망우당) - 근심을 잊고 살아가겠다는 뜻의 호.

9) 홍길동을 지은 허균의 문집에 있는 글, '통곡헌기'(慟哭軒記). 내용인 즉, 조카가 새 집을 짓고는 통곡하는 집, '통곡헌'이라고 이름을 내걸었다.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웃자 허균은 이에 대해 '국사는 문란하고, 관원의 행동은 교만해 가고 있다. 의견이 다르면 서로 칼을 들이대고 어진 이들은 모두 막힌 굴속 같은 세상에서 허덕이다 못해 밖으로 도망칠 생각들만 하고 있다. 그게 바로 지금 세상 되어 가는 꼴이다. 다들 양식 있는 사람이면 굴원(屈原)이 그랬듯이 바위를 지고 강물에 몸을 던져야 하는데 내 조카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함을 스스로 통곡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이여 내 조카를 비웃지 말라'. 허균은 멋지다. 지금에도 구구절절 필요한 말인듯하다. 통곡하고픈 이 세상.

나온 김에. 이번 산행기에 나온 김에. 김 잔치구만. 선물에는 김이 최고더라구요. 뭐야. 구한말 우국지사, 매천 황현이 장원을 하고서도 부패한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를 거부하고 낙향했다. 서울 친구들이 이를 비판하자 "그대는 어찌해서 나를 도깨비 나라, 미치광이들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는가. 나도 똑같이 미친 도깨비가 되란 말인가". 지리산 밑자락으로 돌아와 후학양성에 힘썼다고 하네요. 이것도 지금 상황과 어울리네.

소동파도 여러 차례 귀양가고 또 조정도 욕하고. 시끄러운 개구리떼, 매미떼, 올빼미떼, 쥐고기를 먹는 까마귀떼, 양계장의 가금류떼에 비유하기도 했죠. 심지어 '목욕시킨 후 관을 씌운 원숭이'라고 까지 인용했으니까요. 한번은 "저는 다시 악당소굴로 들어가려 합니다. 이 나이에 골치 아픈 정치생활에 뛰어든다고 생각하니 걱정스럽고 별로 유쾌하지 않습니다. 이, 벼룩, 불한당, 사회의 기생충, 대협잡꾼, 쥐떼". 소동파님, 그러니 매번 귀양가지요.

흥망성쇠의 인간 권력사. 수천년 동안 권력자들의 야망이 부침하는 가운데 고래 싸움에 상처만 입은 새우등은 좀처럼 아물지 않는구나. 아, 슬프다. 안녕.

이헌태의 전격제안. 전 국민이 모두 스스로 호(號) 한가지를 만듭시다. '전국민의 호 한가지화'.서로 부르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사회가 한층 풍류가 넘치고, 사회가 더욱 의와 기가 넘치고. 품격이 높아지고 , 정이 넘치는 문화대국, 결국 문명국이 되지 않을까요. 도둑질 잘 하자, 사기를 잘 치자, 남을 밟고 일어서자 그런 호는 없을테니까요. 좋은 것을 내세우고 실천할테니까요. 진짜로 안녕. '풍류공화국만들기 국민추진운동본부 본부장' 이헌태였습니다. (1월 17,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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