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新부부-(6)친정시대

*"맞벌이 하다보니 자연스레..."

'빙모상.빙부상 조문'이 자연스러운 행사가 됐다.

타지역에 비해 다소 보수적인 대구.경북에서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지인의 빙모.빙부상을 챙기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꼭 챙겨야 할 중요한 행사가 됐다.

신문지상에서도 빙모.빙부상을 알리는 소식을 흔히 접할 수 있다

빙모.빙부상의 일반화와 함께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 신세 안 진다'는 속담도 옛말이 됐다.

아이들은 대개 고모보다 이모를, 삼촌보다 외삼촌을, 친할머니보다 외할머니를 더 따른다.

가족관계의 중심이 남편에서 아내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친정시대'라 할 만하다.

◇현황

지난달 한국여성개발원이 발표한 설문결과는 '친정시대'를 실감케 한다.

전국의 3천500가구 9천109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 따르면 '경제적 도움을 주는 부모'로 남편 쪽(11%)보다 아내 쪽(18%)을 택한 사람이 많았다.

응답자들은 남편 형제(4%)보다 아내 형제(23%)에게 정서적 유대를 훨씬 강하게 느낀다고 답했다.

조사 결과 부모를 모시고 살지 않는 비율이 87.7%로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완전히 정착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편의 부모를 모시는 비율은 11.6%에 그쳐 부계로 이어지는 가족관계는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양가 부모 접촉 빈도는 남편의 31.7%가 한 달에 한두 번 이상 장인.장모를 만난다고 응답해 아내가 시부모를 만나는 비율(40.1%)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한 여성잡지가 최근 27~35세 직장 여성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친정시대가 왔음을 알리고 있다.

설문에 참가한 기혼 여성 중 39%가 친정어머니에게 육아를 맡기고 싶다고 답했다.

시어머니는 친정어머니에 이어 두 번째(14%)였다.

자녀를 친정 어머니에게 맡길 경우 친정 식구들과의 만남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실리 선택

전문가들은 가족관계의 중심이 남편에서 아내 중심으로 이동한 것을 모계사회의 도래나 전통가족의 몰락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신부부들은 형식이나 전통 혹은 가족권력을 떠나 아이 키우고 직장 다니기 편한 실리를 택했다는 것이다.

특히 결혼 후에도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주부들은 친정근처에 모여 살고 싶어한다.

친정 어머니의 도움 없이 집안 일과 육아, 직장생활을 동시에 해내기 어려운 엄연한 현실에 적응한 결과다.

육아와 집안 살림을 친정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주부 양모씨(37.자영업)는 "거의 24시간 보육이 필요하지만 주변엔 그런 시설이 없어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며 "시어머니는 손자를 한 명 더 낳았으면 하는 눈치지만 아이 한 명에도 곤욕을 치르는 친정 어머니에게 미안해 그러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실리선택은 또 세계 최저 수준의 '저출산율'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현재 우리나라 가임 여성 1인당 평균 출산율은 1.17명. 1인당 출산율 6명이었던 1960년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낮은 출산율보다 더 놀라운 것은 출산율 저하의 속도. 5, 6명이던 출산율이 2명 이하로 떨어지는 데 서구 선진국들이 100년 안팎이 걸린 것과 달리 한국은 3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육아부담 때문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부부가 평균적으로 희망하는 자녀수는 2.1명이다.

그러나 실제 출산율은 이에 못 미친다.

직장생활과 양육을 동시에 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같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신부부들이 택한 '실리'가 결국 '친정중심으로 헤쳐 모여'인 셈이다.

◇장모-사위 갈등

직장을 가진 주부 김모(33.대구시 수성구 지산동)씨는 결혼 2년 만에 친정집 근처로 이사했다.

출산 후 육아와 직장생활을 동시에 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저녁 30분 이상 자동차를 타고 가서 친정집에 아기를 맡기고 데려오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는 김씨는 "모계니 부계니 주도권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타협이었다"며 "문제는 친정 가까이 살게 되면서 남편과 친정 어머니간에 생기는 갈등"이라고 말한다.

친정집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김씨는 "가까이 살며 자주 왕래하다보니 미묘한 갈등이 생겼다"며 "친정 부모님이 충고삼아 하는 말을 남편이 몹시 못마땅해 한다"며 걱정했다.

바야흐로 '고부 갈등'이 아니라 '장모-사위 갈등' '장인-사위 갈등'이 새로운 문제로 부상한 것이다.

아동가족학과 전문가들은 고부(姑婦)갈등 대신 장인-사위의 옹서(翁壻)갈등이 심해지면, 현재 처가와의 밀월관계에 또 어떤 변화가 올지 모른다고 지적한다.

박모(34.대구시 달서구 장기동)씨는 "아내가 원했고, 아이 돌보기도 어려워 처가 근처로 이사했다.

그동안 우리 부부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장모님이 생활에 개입하면서 마찰이 생기고 있다"고 말한다.

박씨는 장모가 '왜 집안 일은 손도 까딱 안 하느냐? 왜 그렇게 술자리가 잦으냐?' 고 타박하는가하면 아내도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라며 불만을 터뜨려 거의 매일 싸운다고 했다.

박씨는 장모를 생각하면 집에 들어가기도 싫다고 말한다.

곽모(32.교사)씨는 친정어머니와 남편 사이의 긴장 때문에 괴롭다

친정 어머니가 '똑같이 직장도 갖고 있는데 왜 정 서방은 옛날 남편처럼 구느냐?'고 사위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곽씨는 또 남편이 '장모님은 내가 싫은가 보다'며 불만을 터뜨려 매일매일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사위, 백년손님 아니다

장모들은 이제 더 이상 사위를 '백년 손님'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김옥자(55.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씨는 "집 마련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고, 외손자 2명을 키워주고 있다" 며 "사위에게도 잔소리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매일 보는 사위를 어떻게 손님 대접할 수 있느냐"고 말하는 장모들도 있다.

결혼한 딸과 한집에서 살거나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보는데 어떻게 '손님'처럼 대접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박모(56.대구시 서구 비산동)씨는 "옛날엔 여자들이 결혼하면 층층시하의 시집으로 들어가니 '딸 가진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며 "요즘은 매일 사위 얼굴보고 손자 키워주고 살림 맡아 주는데 어떻게 사위를 떠받들 수 있느냐"고 말한다.

친정 어머니 혹은 장모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는 것은 '맞벌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맞벌이로 인해 친정집 근처로 이사하게 되고 그에 따라 사위는 더 이상 '손님'일 수 없게 된 것이다.

부부가 맞벌이로 나서야 생활이 가능한 '총력 맞벌이 시대'에 어정쩡한 '손님'이 설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