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빈·취리히는 독일과 비슷한 문화권에 속한 도시들이라 그런지 거리 풍경이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시장 골목을 돌아다닐 때도 그런 느낌은 떨칠 수 없었다.
최근 유럽은 자기 나라만의 고유한 모습을 많이 잃어가는 듯했다. 철도가 유럽 구석구석을 하나로 묶으면서 사람들의 이동도 마치 이 동네 저 동네 다니 듯 자유로워진 탓이다. 현지인들에게 들어보니 무엇보다 아랍계 사람들이 유럽으로 많이 건너와 상권을 폭넓게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들어서는 시장마다 터번을 둘러쓴 상인이 꼭 보이고 케밥 상점은 우리 동네 김밥집마냥 흔하다.
프라하 시내에 있는 '하벨레스카'라는 시장을 찾았다. 최근 급부상한 관광도시답게 기념품이나 선물 가게가 대부분이었다. 코루나(체코 화폐)는 유로에 비해 많이 낮은데도 프라하의 물가는 결코 싼 게 아니었다. '동구권인 데다 낮은 화폐단위여서 좀 싼 물건을 살 수 있겠구나'하는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한국 관광객들이 어찌나 많이 다녀갔는지 프라하 시장 상인들이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다섯 명 사면 한 명 공짜" "깎아주세요"라는 말도 배운 모양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나흐스마르크트(Nachsmarkt)'란 시장에서는 더욱 많은 중동인들과 동양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이 파는 물건은 대부분 값싼 의류들, 향신료, 동양인들을 위한 양념류 등이었다. 이곳 양념거리는 한국 시장보다 더 다양해 깜짝 놀랐다. 이곳 사람들은 빵을 주식으로 하지만 쌀을 이용한 요리도 많이 해먹는 듯했다. 식품가게마다 여러 종류의 쌀을 파는데 모두 10kg 미만의 소포장 단위였다. 여기 쌀들은 대부분 차지기보다는 푸석푸석 쌀알이 날리는 그런 종류들이라고 한다. 독일시장에서 보았던 것들을 여기 시장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올리브 절임을 꽁치같은 생선살로 돌돌 만 것은 아무리 봐도 엽기적이다.
한국 식품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상점도 있었다. 라면'스낵류'고추장 등이 대부분으로, 아무래도 중국 상품보다는 소규모다. 시장이 주택가를 양쪽에 두고 도로를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는데 마치 우리네 시골 5일장 거리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가게 모습이나 시장통 거리가 무척 친숙해보인다. 독일에서는 천가방을 들고 시장 보는 모습을 많이 만났는데 여기 빈에서는 아저씨'아주머니'할머니 가릴 것 없이 모두 등나무로 된 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본다.
스위스 취리히역 안에서 본 시장은 참 특이했다. 우선 역 앞 광장도 아니고 대합실 홀에서 열리는 시장이다.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다 우연히 보게 됐는데 노천시장과 달리 우선은 역 안이라 따뜻해서 좋다. 기차가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이곳 사람들에게 역은 마을 앞 정류장처럼 친숙한 곳일 게다. 기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이곳 시장에서 그날 저녁거리를 사가지고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주머니가 두둑하지 않은 여행자들에게는 기차에서 먹을거리를 부담없이 살 수도 있는 반가운 시장이기도 하다.
역 안 슈퍼에서 이것저것 고르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시장이 끝날 무렵이라 조금은 싸게 살 수 있어 좋다. 파장 시간이 되자 하나둘씩 자동차가 역 안으로 들어왔다. 물건들을 실어갈 자동차들이다. 역 안으로 자동차가 들어온다는 것 자체도 신기했지만 이들이 타고 온 자동차가 대부분 벤츠나 아우디 등 고급 차종이어서 더욱더 놀랐다.
어느덧 여행도 끝자락에 접어들었다. 엄마따라 온종일 시장만 보러다닌다고 툴툴거리던 딸 소연이는 이제 중학교 2학년이다. 학기 초에 유럽여행을 하다보니 한참 진도가 나갔을 수업에 낯설기도 하고 걱정도 되겠지만 한 달간의 유럽여행이 남겨줄 추억과 감동에 어느 정도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사실 딸과 단둘이 떠나는 여행이라 두려움도 없지는 않았지만 막상 하나하나 겪어가며 넘어가다 보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남자들은 냉장고를 열고서도 바로 앞에 보이는 고추장통을 못 찾고 여자들은 골목 하나하나 자세히 나와 있는 지도를 펴놓고도 목적지를 못 찾는다'는 말처럼 나도 가끔 이길 저길 헤맨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다른 나라의 골목길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하얀 생크림을 쓰~윽 발라놓은 듯 온통 하얀 눈 세상인 스위스의 알프스, 동화 속 성같은 독일 퓌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 금방이라도 줄리어스 시저가 걸어나올 듯한 로마의 유적지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여행을 하기 전에는 런던에 처음 발을 들여놓으면 외국 땅은 뭐가 달라도 달라 밟으면 무슨 소리라도 나는 게 아닐까 설레고 신기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한나절만에 건너다니면서 지구가 조금은 좁게 느껴지기도 하다. 이 나라 저 나라 살아가는 모습이 별반 다를 게 없고 사고 파는 물건들이 크게 다르지 않는 시장을 둘러보며 세상이 점점 하나가 되어간다는 생각도 든다. 이래저래 가슴에 담은 생각과 감동이 한가득 넘쳐나지만 더 늘어놓을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글·사진 도현주(주부·논술강사)
사진: 빈 나흐스마르크트 시장 안에는 한국 물건들을 많이 파는 오리엔탈 숍도 간혹 눈에 띈다.(사진 위쪽)취리히 역 안에 자리한 시장의 모습. 짐을 실어 나르기 위해 자동차가 역 안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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