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법적용 잘못으로 환치기(불법 외환거래) 사범으로 몰려 형사입건됐던 내국인 140여명이 검찰에서 전원 무혐의 처분을 받은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경찰이 외국환거래법 관련 실무규정 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탓에 멀쩡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범법자로 몰렸다가 검찰의 조사 과정에서 비로소 누명을 벗은 것이어서 졸속수사 논란이 예상된다.
특히 경찰이 소환조사에 적극 협조한 사람들은 입건하고 불응한 사람들에게는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정황까지 드러나 경찰이 수사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한 게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사건 전말 = 서울경찰청 외사과는 올 6월 말 전·현직 지점장이 낀 160억원대'환치기' 일당 128명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경찰이 그 다음달 18일 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할 때에는 입건자가 150명으로 늘어났다.
사건의 개요는 국내 거주자 130여명이 일본에 체류하는 친·인척 등으로부터 각각 1천만원 이상의 돈을 박모(34·구속)씨를 통해 송금받고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아외국환거래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박씨에게 엔화를 원화로 환전해준 국내 모 은행 지점장 등 은행원 7명도같은 혐의로 입건됐다.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는 이들 전원을 기소해달라는 의견이 첨부된 사건 기록을송치받아 법률검토를 벌였으나 박씨 등 2명만 실정법을 위반했고 나머지 148명은 법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사건 연루자 중 1명은 기소유예됐고 박씨는 일본내 불법체류자들이 강제퇴거를우려해 은행을 이용하지 못하는 점 등에 착안, 송금 희망자들을 대신해 돈을 국내로부쳐주는 '무등록 송금업무'를 한 혐의가 인정돼 구속기소됐다.
◇사건 처리상 문제점 = 경찰이 이 사건 처리과정에서 노출한 문제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경찰은 수사의 기본이 되는 관련 법률의 검토작업을 소홀히 했다는 지적을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외국환거래규정 제5-10·11조에 따라 '(국내) 비거주자로부터 영수'한 경우에는관계당국에 (송금 사실을) 신고할 의무가 없다고 명시돼 있다.
이 법은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돈은 문제삼지 않는 만큼 송금 경로가 금융기관이든 개인이든 재정경제부 장관에게 신고하지 않았어도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찰은 수사 초기에 무등록 송금업자 박씨를 통해 1천만원 이상을 송금받은 국내 거주자 430여명을 수사 대상에 올려놓고 조사에 들어가 130여명만 입건한 것도쉽게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이다. 나머지 300명이 입건 조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경찰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기때문이라는 게 경찰의 사건 기록을 검토해본 검찰의 설명이다.
수사에 적극 협조한 경우는 입건되고 소환에 불응한 사람은 오히려 불입건되는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경찰이 돈을 송금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사람들에게 입건 사실을 제대로 알렸는지도 의문이다. 상당수 외환 수령자들이 사건이 검찰로 송치된 뒤에야 비로소 입건된 사실을 알았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모씨는 "일본에 사는 친척에게 김치 등 생필품을 보내주고 돈을 송금받았는데두 달 전 소환을 받고 경찰에 나갔다가 '송금업자 박씨를 잡아넣으려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 뒤 내가 입건됐다는 사실을 검찰에서 알고황당했다"고 말했다.
김모씨도 "일본에서 일하는 딸에게서 돈을 받아 쓴 사실 때문에 경찰에서 조사받은 일이 있지만 내가 입건돼 재판을 받게 될 뻔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듣게 됐다. 남들이 알면 무슨 큰 죄나 저지른 줄 알 것 아니냐"며 분개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외국환거래에 위법 행위가 있다고 판단해 관련자들을입건 조치한 뒤 이를 당사자들에게 일일이 통보했기 때문에 입건 사실을 몰랐을 리없다"고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또 "입건 대상자 선별은 경찰 나름의 기준에 따라 정한 것이다. 검찰에 송치된 뒤 입건자들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서울경찰청의 한 간부는 "비정상적인 거래에는 영수자(돈을 송금받은 사람)도처벌하는 게 맞다. 경찰 수사단계에서 영수자를 수사하지 않고 송치했다면 검찰에서거꾸로 지적했을 거다. 다만 애매한 사람까지 전과자를 만드는 외국환거래법은 개정돼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간부는 또 소환 불응자를 입건하지 않은 이유와 관련, "수사가 종결된 것이아니다. 소재파악이 되면 추가 입건하겠다"고 설명했다.
◇ 졸속 수사 원인은 = 경찰은 이른바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가 불거진 이후수사지휘를 받지않고 불쑥 사건을 송치해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번 사건도 유사한 사례였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경찰은 무등록 송금업자 박씨와 은행 지점장 김모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려할 때에만 수사지휘를 받았다는 것이다.
검찰은 박씨의 영장만을 청구하고 지점장 김씨의 경우는 혐의를 인정하기 어려워 영장을 기각했다. 이후 경찰은 일본에서 친지 등으로부터 돈을 송금받은 130여명이 마치 엄청난범죄라도 저지른 것인 양 형사입건하고 이 사실을 언론을 통해 발표한 뒤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 관계자는 "경찰이 검사들의 수사지휘를 안 받겠다면 다른 유관기관에라도자문을 구했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이런 과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고꼬집었다. 서울세관 외환조사1과 관계자는 "외국의 친지가 다른 사람 명의로 돈을 보냈더라도 국내 수령자는 자세한 경위를 모르는 일이 많아 범의(犯意)가 없다고 봐야 한다"며 경찰의 이번 처리결과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 관계자는 또 "외국환거래법은 기본적으로 외국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돈은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이 법에는 예외규정이 많아 시행령과 관련 규정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실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서울중앙지검 고위관계자는 "이번 건은 경찰이 실적을 부풀려 멀쩡한 시민을 마구잡이로 범법자로 입건하고 언론에 공표해 현실적인 인권침해를 야기한 것이다. 자칫 검·경 수사권 조정과 연계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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