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고3 수험생을 둔 아버지입니다. 가족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수험생인 아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누구 못잖지만 평소 직장일이 바빠서 아내에게 교육문제를 다 맡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등교하는 아들에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의 말을 했더니 아들이 '아버지는 제 공부에 관심이나 가지고 계신 겁니까?'라는 충격적인 답변을 했습니다. 아들에게 어떻게 아버지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지, 지금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언을 구합니다.
답 : 우리가 잘 아는 영화 속의 두 주인공 제임스 본드와 람보는 폭력적 인간입니다. 그러나 외양과 풍기는 분위기는 매우 다릅니다. 람보는 근육질의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채 무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닙니다. 람보는 항상 심각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적과 대치합니다. 제임스 본드는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살상무기를 옷이나 자동차, 가방에 숨기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제임스 본드는 어떤 난관이나 위기에 부딪혀도 미소를 잃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세련된 매너도 돋보입니다. 제임스 본드는 이상적인 남성의 전형으로 모든 남녀 팬들을 열광시킵니다. 그러나 폭력성과 잔인성은 제임스 본드도 람보에게 별로 뒤지지 않습니다.
람보와 제임스 본드 중 누가 더 스트레스를 받을까요. 아마 제임스 본드가 더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을 겁니다. 제임스 본드는 빈틈없이 임무를 수행해야 하며 위기일발의 순간에도 당황하지 말아야 하는 신같이 완벽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완벽성을 가장할수록 공허감은 커집니다. 남에게 약한 면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제임스 본드는 공허감과 스트레스를 여자를 통해 해소하려 합니다. '본드 걸'과 놀아나는 그의 일탈적 행위에서 우리는 제임스 본드의 극심한 스트레스와 공허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일시적이고 육체적이며 진실하지 못합니다.
1997년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은 시점부터 명퇴, 조퇴는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고 심지어 황퇴(황당한 퇴직) 같은 신조어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상황에서 대다수의 아버지들은 하루하루를 숨가쁘게 살아야 했습니다. 아니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이 땅의 아버지들은 제임스 본드처럼 처신해야 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하고, 직장에서는 빈틈없이 업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행동하려 할수록 공허감과 스트레스는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해소할 길이 없었습니다. 영화 속의 본드 걸은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기껏해야 퇴근하면서 동료들과 함께하는 삼겹살과 소주 한 잔이 유일한 낙이었고 탈출구였습니다. 아버지 세대들이 즐겨본 영화 '007'과 '람보'에 대한 어느 평론가의 해설에다 상담자의 견해를 더 보태어 우리 아버지들의 힘겨움을 표현해 보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의 가슴 속에 꽉 차 있는 공허감과 삶의 비애를 속속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질문에서 부끄럽지만 조언을 구한다고 하셨는데 너무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철이 없어서 그렇지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할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전에는 아침과 저녁을 먹을 때는 밥상을 다 차려 놓고 집안의 상 어른이 숟가락을 먼저 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맨처음으로 아침 숟가락을 드는 것은 하루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하루를 알차고 보람 있게 살라는 의미 있는 의식이자 출정식이었습니다. 하루가 저물고 저녁 시간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밖에서 놀다가도 때맞추어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녁상을 받아놓고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누군가가 집밖으로 찾으러 나갔습니다. 집안의 상 어른이 저녁 숟가락을 높이 드는 것은 하루의 마감을 선언하는 정리의 의식이었고 하루의 수고에 대해 서로가 격려하고 칭찬해주는 축복의 의식이었습니다.
산업사회가 시작돼 각자의 활동 시간대가 달라지면서 우리는 이런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하루의 시작과 끝을 온 가족과 함께하며, 한 주일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수고를 인정해주고 격려하며 칭찬해 주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매일 마주한다고 자녀가 부모의 존재를 인정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짧지만 뭉클한 사랑을 느끼게 해 주고 진실하게 대화하면서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당분간만이라도 가능하다면 일찍 집에 들어가십시오. 아버지의 걱정과 불안을 아이가 느끼게는 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아이가 부담을 느낄 정도로 지나친 격려의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신뢰를 그냥 눈빛으로만 느끼게 해 보십시오. 좋은 결실을 맺어 온 가족이 행복한 연말을 맞이하시길 빌겠습니다.
윤일현(송원학원진학지도실장 ihn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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