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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화가

'나는 굶어 죽지는 않았지만 허기를 느끼지 않은 때가 거의 없었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중.

저녁 뉴스에 날씨가 추워져 서리가 온다기에 고추와 덜 익은 호박을 따서 냉장고와 화실에 두었다. 밤새 서리가 오면 식물들의 이파리가 순식간에 시들고 열매는 얼어서 먹을 수 없게 된다.아직 가을이지만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벌써 걱정이 앞선다. 겨울채비를 해야 하는데 마음만 갖고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행히 서리는 오지 않았으나 기온이 뚝 떨어져 사뭇 긴장된다. 그림을 팔아먹고 사는 화가들은 겨울나기가 힘이 든다. 작업실이 도시에 있거나 시골에 있거나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한 생활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소위 예술가라 하지만 이 사회는 예술가에 대한 대책이 아무것도 없다. 화가도 직업인데 이 사회의 시스템은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림을 그려 팔지 않으면 굶어 죽고, 그림을 많이 그리면 빚이 늘어난다. 공급과 수요가 맞지 않는 아이러니컬한 현실이고, 제대로 된 화상이 없고 작품을 소화시키는 화랑이 영세하기 때문에 악순환이 거듭된다.

개인 컬렉터(수집가)가 있으나 연속적인 작가 지원이 어려워 화가들은 늘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하는 일에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화가를 보면 화가 난다'는 후배 말에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극재 정점식 선생의 에세이집 '화가의 수적' 중 때로는 혈서 같은 예술 편에 보면 1950년대 파리의 밤 아가씨들 수가 5만이면 그와 같은 미술가가 있는데 그 중 밥벌이를 하고 있는 수는 1%에 불과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밤거리의 아가씨와 같은 고달픈 신세이다. 그러나 이들은 멋쟁이도 거지도 실업자도 아닌 진지한 인간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대구에는 몇 프로가 그림으로 먹고 살고 있는가? 미술가가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겪어야 하는 고통은 늘 감수하고 있으나 사회적 관심이 없으면 예술가는 일찍 죽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붓을 놓고 만다.

근대적 방식으로 젊은 예술가를 대하면 세계화 시대에 경쟁력을 잃게 된다. 대구라는 도시는 전통 보수적인 곳이라 작가에게 먹을 것은 적게 주면서 매우 고난도의 훈련을 시키는 동네이다. 여기서 살아남으면 어디 가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어느 도시보다 미술 인적 자원이 많고 좋은 작가도 많아서 예술도시가 될 확률이 높다. 또 방사선형 도시라 예술적 관심이 이른 시간에 고조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나 사회전반적인 움직임이 예술과 문화에 되살아나지 않는 한 죽은 화가의 사회가 될 것이다.추운 계절이 곧 온다. 이 도시에서 고군분투하는 화가들에게 따뜻한 시선과 새로운 계기를 마련할 때가 온 것 같다.

정태경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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