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손입강(孫立剛·28·대구 중구 남산4동) 씨.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법 체류 외국인노동자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 왔던 한국. 그에게 한국이란 뺏아가기만 한 나라였다.
그리고 몇 년. 손 씨는 지금 어엿한 무역업체 사장명함을 들고 직원 채용까지 계획한다.
그의 인생 역전 드라마 촬영(?) 기간도 불과 5년.
손씨가 인천항에 첫 발을 디딘 건 지난 2001년 12월19일. 그는 현지 브로커에게 500만 원을 건네고 단기상용(C-2) 비자를 손에 쥐었다.
한국에서 얻은 첫 직장은 경북 경산시 와촌면 모 산업용 부직포 제조공장이었다. 익숙치 않은 고된 노동과 서툰 한국말 때문에 혼도 많이 났다. 밤 마다 혼자 눈물을 삼켰다. 이후 그는 조금이라도 월급이 많은 공장을 쫓아 일터를 옮겨 다녔다.
2002년 10월, 대구 달성군 한 플라스틱 수지 제조공장에서 일하던 손 씨는 야간작업 도중 기계고장으로 오른팔 신경을 다쳤다. 주먹을 완전히 쥘 수 없게 됐다.
팔을 다친 손 씨는 공장에서 쫓겨났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대구외국인노동자상담소를 찾았다.
손 씨는 이 곳 도움으로 산업재해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2천 600만 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쥐구멍에도 볕이 떴다. 2004년 8월, 외국인 고용허가제 실시를 앞두고 손 씨에게는 합법체류 자격이 주어졌다.
그해 12월 18일. 손씨는 그동안 모은 돈과 산업재해 보상금을 합쳐 5천만 원의 자본금을 마련, 그는 유한회사를 설립했다. 한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스스로 약속한 것이었다.
손 씨는 마늘, 생강 등 중국산 농산물을 한국으로 수입하고 한국의 자동차 부품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중계 무역을 하고 있다. 직원없이 혼자 일하면서 한달 평균 5천만 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사업은 번창 중. "중국 시장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질 좋은 물건을 싸게 갖고 올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사업을 하면서 넘어야 할 산도 많았다. 세무서 담당직원은 "나이도 어린 외국인 노동자가 어떻게 투자금을 마련했냐"며 미심쩍은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서류 가방에 선불 국제 전화카드를 2, 3천만 원치씩 들고 다니며 일일이 펼쳐 보이고 설명해야 했습니다."
손 씨의 수첩은 거래처 주소와 전화번호가 '한글'로 빼곡이 적혀있다. 손 씨의 한국어 실력은 꽤 유창한 편. 5년 전까지만 해도 한글이라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그였다.
그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이란 단어를 좋아했다. 한국 도착 날부터 밤마다 짬을 내 한글을 공부했다.
"타자속도가 느린 편이지만 모든 업무를 노트북을 이용, 한글로 처리하고 있어요." CEO로서 철저한 현지화 전략인 셈. 곧 직원 4명 채용 공고를 낼 예정이다. 사업이 너무 잘돼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 경북 칠곡에 500평 규모 냉동창고를 세우는 작업도 올해 마쳐야할 과제.
그는 팔을 다쳤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한국이 '따뜻한 나라'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특히 대구경북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
그는 한국 사람들에게 받은 친절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지난해 4월부터 대구 달서구 한 청소년 쉼터에 매달 40만 원씩의 '거액 후원금'을 내고 있다. 자신의 한달 생활비는 5년 전과 똑같은 5만 원에 불과한데도.
"꿈을 잃지 않는 것, 목표를 향해 느리지만 한걸음씩 걸어가는게 제 신조거든요. 올해는 대구에서 몇 걸음 내딛는 것이 목표입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 : 손입강(28) 씨는 병술년,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있다. 중국에서 대구로 건너와 불법체류자 신세로 전락했던 손씨는 드라마같은 인생역전에 성공, 어엿한 대구 사업가로 변신했다. 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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