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얼큰하여 퇴근하는 김 부장

어둠에 등 떠밀려 아파트 문을 열면

또 다시 운동장 같은 어둠

TV리모콘을 누른다

몰려들었던 어둠 한 발짝 멀어지고

화면 속이 어수선하다

구조대의 붉은 제복이 뛰어가고

모자이크 처리된 검은 물체가 건져 올려진다

하얀 천에 덮인 죽음 사이로

발가락이 빼꼼 나와 있다

그 발은 고향행 열차에 마음만 실어

자궁 속 같은 시간을 거슬러

아지랑이 피는 그때로 가는 중이었고

전화벨 소리,

허공만 맴돌다 이윽고 사라지고

TV를 끈다

기다리고 있던 어둠 다시 밀려오고

어둠에 살며시 몸을 기댄다

그 발가락은 이 어둠이 그리웠는지 모른다

우문상 '기러기 아빠'

'기러기 아빠', 해체된 가족의 아버지상(像)이다. 이 시대가 낳은 '기러기 아빠'가 술 취해 돌아온 집은 가족이 없다. 가족이 없는 집은 위안과 안식을 주는 둥지가 아니다. 또 다른 어둠의 현실일 뿐이다.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오면 'TV'와 '어둠'이 아버지(김 부장)를 맞는다. 아버지가 집에서 위안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TV리모콘을 누르'는 것이 유일하다. 그러나 TV에서도 위안을 받지 못한다. 현대 문명은 거기에서도 인간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김 부장들은 어쩔 수 없이 밤마다 홀로 '어둠에 살며시 몸을 기대'어 잠들 수밖에 없다. 이때의 '어둠'은 차라리 위안으로 오는 것이다.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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