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미국 슈퍼볼 최우수 선수로 뽑힌 하인스 워드. 이 혼혈 흑인 영웅의 '싱글 맘'이 한국여성이란 사실 앞에 우리는 무조건 좋아했다. 마땅한 노릇이었다. 지금쯤은 차분히 '워드'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내부를 들여다보면 좋겠다. 내 눈에는 유난히 '민족'이 불거져 보인다.
'양철북'의 독일작가 귄터 그라스는 통독(統獨)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한마디로 '강성대국 독일'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두려워했다. 미래의 언젠가 히틀러의 파시즘이 부활할지 모른다는 경종을 울렸다. 만약 한국작가가 '통일반대'의 목청을 높인다면…? 땅벌 떼거리 같은 사이버 욕설이 쓰러뜨린 그의 몸 위에 돌멩이 무덤을 이룰지도 모른다.
요새는 그런 집단적 폭력이 정당성마저 획득할 조건이다. 돌멩이 무덤의 한복판에다 '반민족주의자'란 깃발을 매단 죽창 하나쯤 꽂아놓으면 그 자리는 신성불가침의 조그만 성역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 '민족'에 담보된 위험한 운동성의 한 면모다.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 100년'을 헤쳐나가는 고난의 노정에서 1980년대 한때 명료해진 적도 있지만, 민족은 곧 '외세와 분단 극복'의 의지요 표상이었다. 이것은 단일민족이란 말에 생명력을 유지해주는 동시에, 한반도의 민족주의에 꾸준히 배타주의를 수태시켜 왔다.
그럼에도 남녘에선 독재에 저항하는 상황이 거기에 각별히 주의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북녘은 훨씬 심각하다. 평양정권이 외치고 또 외치는 '우리 민족끼리'의 그 민족이 바로 '반외세 자주통일'이란 대의명분 밑의 배타적 민족주의다.
지난해 여름에 평양과 백두산 일대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에 참가했을 때, 마치 '반갑습네다'라고 인사하듯 자연스레 하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 정치적 거대담론과 일상언어가 변별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남녘의 일상생활에도 배타적 민족주의가 작동된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정치적 거대담론에 세뇌되지 않았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그것을 드러내는 생생한 현장은 '코리안 드림'을 품고 고달픈 일터로 뛰어든 아시아 출신 외국인에 대한 모욕적 선입견과 반인간적 차별이다.
이러한 우리가 전국의 읍'면마다 빠짐없이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현수막을 몇 개씩이나 걸어놓았다. 도시의 건물에 나붙은 '임대 놓습니다'라는 현수막보다 더 많을 것이다. 베트남 처녀는 결코 '임대'가 아니라는 점도 명백히 명시하고 있다.
한국남성이 '초혼'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재혼'도 그럭저럭 좋고 '늙은이'라도 괜찮다는 식의 등급 구별은 전혀 없이 초혼'재혼'늙은이 가릴 것 없이 '무조건 환영'이란다. 밤마다 비아그라를 삼키더라도 늦둥이 생산하라는 출산장려의 낌새마저 풍긴다.
문제는 2세다. 운 좋은 '이민족' 여성은 그나마 착한 남편의 품에 안겨 서러움을 녹여낸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걸음마 배우며 인생을 시작하는 그들의 혼혈아는 우리의 습성처럼 굳은 배타적 민족주의 때문에 심각하게 상처받을 가능성에 늘 노출된다.
손톱에 매니큐어 바르고 룸 가요방으로 출근하는 젊은 여성은 넘쳐나도 손톱 밑에 흙 넣을 젊은 여성은 아예 씨 말라 버린 나라, 그래서 아시아의 '이민족' 여성을 아내와 어머니로 수입해와야 하는 나라.
벌써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한국사회는 우리의 숱한 '이민족 어머니'들이 미국의 '하인스 워드의 어머니'처럼 심적으로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고, 그들의 2세들이 하인스 워드의 소년시절처럼 그늘지지 않게 해줄 문화를 성숙시켜야 한다. 이 큰 변화의 첫걸음은 저마다의 내면에 도사린 배타적 민족주의의 폭력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지난해 말에 별세한 재일 교포 김경득(金敬得) 변호사, 아무리 소송에 져도 재일 교포 인권문제의 현장을 누비며 '일본 국립대 교수직과 지방정부 공직에서 일본인 국적 조항'을 폐지하고 지문날인 철폐운동에도 온 몸을 바친 인권운동가.
그는 일본사회에 '재일 교포는 일본인이 국제화의 과정에서 조우한 첫 외국인'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생전 고인이 전개했던 외로운 투쟁을 지켜보며 우리는 일본의 '민족'에 얼마나 분노했던가. 이제 그 시선을 엄격히 내부로 돌려야 한다.
이대환(소설가)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