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름진 들녁에 희망을 심어요"

…상주 연봉마을

주름진 농촌에도 봄은 여지 없이 찾아왔다. 반짝했던 끝물추위로 잠깐 움츠렸던 들판은 농부들의 왁자한 들썩거림과 농기계 소리가 가득하다.

15일 오후 상주지역 최대 배산지로 유명한 외서면 연봉마을. 이미 가지치기를 끝내고 밭갈이와 퇴비주기 등으로 땅심 높이기가 한창이다. 18년간 애지중지 키워온 배나무들이 줄지어 선 700여평의 과수원에 퇴비주기에 바쁜 김순악(63·여) 씨는 "다음달 초·중순쯤 배 꽃이 피면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없을 것."이라며 "인공수정이다 뭐다해서 눈코뜰새도 없을테지만 하얗게 흐드러지는 배꽃은 한 해의 희망"이라고 했다.

김씨는 남편을 미리 떠나보내고 2년전에는 아들(39)마저 뇌경색으로 몸져 누웠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다. "내가 아니면 내 아들 병을 고쳐줄 사람있나? 올해는 배값도 오르고 아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끝으로 퇴비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과수원 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떨어진 감 묘목장. 중장비가 굉음을 내며 묘목을 캐내고 서너명의 아주머니들이 묘목뿌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2년전 심어놓은 둥시감 묘목을 수확하는 곳이다. 농장주인 김병화(48·상주 남성동) 씨는 "각종 농업환경 변화로 쌀 농사를 포기하면서 감 농사를 준비하는 농가가 늘고 있다."며 "오늘은 둥시감나무 묘목 2천여 그루를 수확할 계획."이라 했다.

또 다른 배밭에서 만난 석종성(70·상주 외서면 연봉리) 씨는 온 몸에서 희망이 넘쳤다. 6천여평의 배 밭이 외서농협의 대만, 미국수출단지로 포함돼 판로에 걱정없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또 있었다. 아들 영수(32) 씨도 인근 사벌면에서 함께 배농사를 짓게 된 때문. "아직은 아무것도 몰라 하나하나 가르쳐야 된다."면서도 입가에는 흐뭇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들판. 강길원(71) 씨는 "억지춘향으로 농삿일은 해 보지만 지난해 같은 꼴을 당할까 걱정."이라며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우짜겠노. 먹고 살자면 쟁기질이라도 하고 파종 준비는 해야지."라며 소몰이에 나선다. 그것도 잠시, "송아지가 우사에 있어 어미가 말을 잘 안듣는다"며 고삐를 놓고선 "온김에 한 잔하자"며 땅에 묻어둔 쉰 김치와 막걸리 한 통을 내놓았다.

봉화읍 적덕리 박춘기 씨의 비닐하우스도 봄 상추를 수확하는 아낙네들의 수다로 가득했다. 품앗이를 하던 신동숙(32.봉화읍 화천리) 씨는 "지난해 양배추, 단호박을 심었다가 가격이 폭락해 헛 농사였어요. 품앗이라도 해서 일손이라도 벌어놔야 농사가 편해요."라고 했다.

경운기로 논 갈이를 하던 김대환(35) 씨는 "지난해 처음으로 우렁이 농법으로 벼농사를 지어 친환경쌀 농산물 인증을 받았지만 쌀 값하락으로 고스란히 묵히게 됐다."면서도 "올해는 제대로 해봐야 겠다."고 희망차게 이야기했다.

FTA에 따른 밥쌀 수입과 고령화 등으로 주변환경은 점점 어려워가고 있지만, 봄을 맞는 농부들은 아버지, 할아버지, 또 그 위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농사가 아니라 희망을 짓고 있었다.

상주·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봉화.마경대기자 kdm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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