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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골초였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군대에 가서 담배를 배웠다. 정말 초병 생활의 무력함과 병영생활의 답답함을 달래려고 담배를 배웠는데, 그게 20년이 넘도록 내 의지를 무력화하고 내 삶의 의식을 옭아매는 악연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몇 번이고 담배를 끊겠노라고 다짐을 했지만, 그 때 마다 작심삼일에 그치고 마는 자신이 참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집에서 아내 모르게 숨어가며 담배를 피웠는데, 요즘은 다 큰 아이들의 기관지가 약한 것이 그런 내 잘못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이들 방에서 기침소리가 날 때면 가위꿈을 꾸듯 가슴을 쓸어 내리곤 하는 것이다. "기회만 있으면 끊어야지" 속으로만 수없이 외치고 있었는데, 2000년1월 1일, 그 기회가 예고도 없이 불쑥 나를 찾아왔다.

1999년12월31일. 우리 가족은 예년과 같이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동해안을 찾았다. 호미곶은 한마디로 새천년의 새아침을 일출과 함께 맞으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런데 민박은 물론 숙박업소가 모두 만원이어서 우리는 승용차 안에서 새벽을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겨울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일출은 구경도 못하고 동해를 뒤로한 채 경주로 넘어오는데, 도로는 범람한 차들로 주차장이 되어있었다. 운전자들이 밤새 잠을 설친 탓인지, 차량들도 비 오는 도로에 퍼질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노라니 담배는 떨어졌고 한 모금 담배연기가 또 간절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의 핀잔을 뒤로하고 재떨이에서 피우다 비벼 끈 꽁초를 찾아 입에 물었다. 그런 모습을 뒷좌석에서 바라보던 아이들이 연거푸 기침을 쿨룩거리며 말을 꺼냈다.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불쌍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 이참에 끊어버릴까."하고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화근(?)이 되었다. 얼떨결에 아이들에게 금연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담배와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새천년 시무식을 하면서 직원들에게도 새해부터 금연을 시작했다고 공개 선언을 했다. 사흘을 참고 나니 오기가 생겼다. 삶이란 새로운 약속을 만드는 것이고 이미 만들어 놓은 약속들을 지키는 일의 연속이 아닌가.

자신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위인이 누구와 어떤 약속을 하며 살 것인가라는 논리로 스스로를 늘 핍박했다. 금단증세로 숱한 고생을 하며 주변 사람들도 많이 괴롭혔다. 그러나 아이들과의 약속을 깨트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 보다 더 처참한 형벌이었기 때문이었다.

김환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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