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강문숙 作 '소나기'

소나기

강문숙

남김없이 쏟아내고 싶었어.

천 년 동굴 속의 이무기처럼 내 오늘을

기다렸어. 비굴하게 휘어지지 않고

수직으로, 혹은 빗금으로 단호하게

내리꽂히고 싶었어.

네 속살이 빨갛게 부풀도록

잠들었던 풀잎이 다시 깨어나도록

온몸으로 뛰어내리고 싶었어.

마른 길 골라 다니며

잘도 피해 가던 발 빠른 벌레들,

눈앞이 아찔하게 뭉개버리고 싶었어.

여름 오후, 단호한 선언문처럼 쏟아지는 소나기.

나는 이 막무가내의 단순함에 복종하고 싶다.

우리는 '마른 길 골라 다니며/ 잘도 피해 가던 발 빠른 벌레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의 기법을 이른바 '처세술'이라며 위안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은 굴절되지 않은 삶, '비굴하게 휘어지지 않'는 삶이었지요. 소나기처럼 '수직으로' 혹은 '빗금으로 단호하게/ 내리꽂히'는 삶이었지요. 그런 삶의 실천이야말로 '잠들었던 풀잎이 다시 깨어나도록' 할 수 있음도 충분히 알고 있지요. 약삭빠른 몸짓으로야 마른 잎 하나 움직일 수 없겠지요.

이 여름 오후, 우리는 진심으로 '복종하고 싶' 은 '막무가내의 단순함'을 실천하는 그 누군가를 기대하며 투표했을 것입니다.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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