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전 대구 서부도서관에서 만난 나혜(북비산초교 4년·10)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혜는 이 날이 평생 잊지 못할 날이라고 했다.
"풀코스 마라톤을 드디어 완주했거든요."
이 더위에 왠 마라톤? 알고보니 나혜는 서부도서관에서 주최한 '독서 마라톤' 주자로 나서 이날 아침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4만2천195페이지, 220권 분량의 기나긴 독서 여행이었다. 매주 10권씩 책을 대출받아 읽었다. 지난 3월부터 시작했으니 꼬박 5개월 동안 책 속을 달리고 또 달린 셈이다. 독서 대출 카드에 기록된 마지막 책은 '아라비안 나이트'. 책과 함께 한 마라톤은 내내 흥미진진하고 즐거웠다.
"어찌나 책을 좋아하는지 학기 초마다 담임선생님한테 '제발 책 좀 못 읽게 말려달라'고 편지를 쓸 정도였다니까요."
나혜 엄마가 전해 준 딸의 책 사랑은 초등학생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혜는 아침에 눈 뜨면 책부터 찾는다고 했다. 가방에는 늘 2, 3권의 책을 넣어간다. 쉬는 시간에도 읽고, 수업시간 중에도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읽는다. 급식시간에는 밥을 먹으면서 읽고, 간식을 먹으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가져간 책을 다 읽으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가져와 또 읽는다. 눈도 많이 나빠졌다. '책 못 읽게 하라는 부모님은 처음 본다.'며 의아해하던 담임 교사도 그제서야 엄마의 애타는 당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혜의 독서 습관은 여섯 살 무렵, 엄마와 함께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면서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역시 책을 좋아하는 아빠 옆에서 그림책 보기를 좋아하던 딸은 엄마가 빌려온 책을 술술 읽어내려갔다. 휴일에는 온 가족이 도서관을 찾아 책을 대출했다. 책 좋아하는 누나를 따라 남동생들도 책만 펴놓으면 싸우는 법이 없다.
나혜는 요즘 위인전에 푹 빠져있다. 단순히 전기문이 아니라 책 속 주인공의 행보를 찬성과 비판의 양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 책이다. 학습만화도 물론 좋아한다고 했다.
엄마는 성적이 좋아진 건 둘째 치고라도 책을 많이 읽은 후 나혜의 사고력과 말 솜씨가 또래에 비해 놀랄 정도로 나아졌다고 했다. 말싸움에서는 엄마도 도저히 딸을 따라가지 못한다며 웃었다.
"한 번은 동생이 물건 깬 사실을 모르고 무작정 나혜부터 야단쳤더니, '엄마 내 말 들어봐. 화가 나는 건 이해하는데 난 이러이러한 이유로 깨지 않았어요'라고 하지 않나, 매일 쓰는 일기가 힘들어 보여 요일을 정하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일기는 기억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쓰는 게 아니냐'고 되묻더라구요. 말문이 턱 막히대요."
나혜는 마라톤 완주 전날에도 밤 11시까지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다 잠이 들었다고 수줍게 말했다. "책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더니 "한 줄 한 줄 읽다보면요, 머리 속에 장면이 그려지고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도저히 책을 덮을 수가 없어요."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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