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영천호를 따라 보현마을로 가는 길에는 만추(晩秋)의 정취가 가득하다.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들이 절로 시심을 자아낸다.
69번 지방도를 벗어나 산길을 10여 분쯤 달리자 마을을 굽어보는 기룡산(騎龍山·961m)과 보현산(1124m)이 반갑게 맞아준다. 많은 불교 전설을 품고 있는 산들처럼 기슭기슭에 자리잡은 마을 이름도 불교에서 유래한 게 대부분이다. 탑골, 절골, 보현, 정각….
명산의 음덕일까. 마중 나온 조정숙(48·여) 보현보육센터장, 조충래(43) 보현녹색농촌체험마을 사무장의 눈빛이 맑기 그지없다.
"밤하늘 아름다운 은하수 아래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저희 마을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조 사무장의 마을 소개에 이어 곧바로 첫 번째 체험이 시작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레방아 수력발전이다. 물레방아도 보기 힘든 마당에 전기까지 만든다니 아이들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제일 잘 하는 가족에게는 배추를 선물로 드립니다." 배추 한 포기가 뭐 그리 대단할까마는 효험이 크다. 옷 버리는 것쯤이야 아랑곳하지않고 모두들 힘껏 물레방아를 돌린다. "엄마, 정말로 전구에 불이 켜졌어요." "그래, 얼마나 전기를 힘들게 만드는 줄 잘 알았지. 앞으로는 집에서도 전기를 아껴 쓰자꾸나."
커다란 가마솥에서는 맛있는 두부가 끓는다. 구수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고 콩비지가 금세 동이 난다. 두부가 만들어지는 동안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의 함성이 메아리친다. 잘 될 것 같으면서도 뜻대로 되지않는 투호와 굴렁쇠 굴리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꼬마야, 꼬마야 줄을 넘어라.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줄을 돌리는 엄마도, 줄을 넘는 아이도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저녁식사가 끝날 즈음 반가운 손님들이 마을을 찾았다. 별자리 공부를 위해서 먼 길을 달려온 포항 세화고 김진협(43), 경북과학고 오상진(40) 교사이다. "밤하늘에서 제일 밝은 별은?" "제일 비싼 별은?" 흥미로운 강의에 모두들 귀를 쫑긋 세운 채 별나라 여행을 떠난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신라 유물, '14면체 주사위놀이'는 낯설어하는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노래 부르기, 춤추기, 손 안대고 물 한 잔 마시기, 모두 함께 간지럽히기…. 구들장 위에서 삼겹살이 익어가는 사이 조 사무장의 구성진 '진주난봉가'가 마음을 울린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 년 만에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실 것이니 진주 남강 빨래가….' 보현산 약초로 빚은 동동주 한 잔에 별 헤는 밤이 속절없이 익어간다.
이튿날 아침,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린다. 동해 용왕이 의상대사의 설법을 듣기 위해 말처럼 빨리 달려왔다는 기룡산 위로 구름이 승천한다.
간밤의 숙취를 고디탕으로 달래고 김치만들기에 도전한다. 대형 소매점에서 사먹는 김치에 익숙한 젊은 부모들은 하나라도 더 배워갈 요량으로 조정숙 씨 옆에 바짝 붙어앉는다. 오늘 만드는 김치는 보통 김치가 아니다. 감초·오가피 줄기·호박·대추·표고버섯 등 11가지 약재를 넣은 한방 김치다. 채 버무리기도 전에 침 넘키는 소리가 요란하다.
푸짐한 인심을 가슴 가득 선물로 받고 돌아서는 길. 굵어지는 비 때문에 임고서원을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보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크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습니다. 이젠 농촌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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