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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100주년] 2인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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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발생,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일제가 큰 위기를 느낀 '국채보상운동' 주역은 서상돈과 김광제. 이 두사람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5천년 민족 역사상 최초의 '국민운동'을 만들어낸 두 주역에 대해 살펴봤다.

◆서상돈(徐相敦·1850~1913)

1866년(고종3년) 병인사옥(병인교란)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대박해를 받았을 당시, 서상돈은 신앙문제로 인해 대구로 피난온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조선 정부의 엄청난 박해에도 불구, 독실한 천주교 신앙을 유지해온 그는 대구의 첫 천주교 신부로 임명된 김보록(로벨드) 신부를 통해서 독실한 신앙을 가꿔온 것은 물론, 천주교회를 통해 알게된 인맥을 이용해 중국 등지와의 상거래를 터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1871년부터 지물행상 및 포목상을 시작, 1886년에는 대구의 재벌로 부상했고 이를 바탕으로 경상도 시찰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쌓은 부를 바탕으로 천주교 대구교구가 설립되자 이의 발전에 노력했다. 또 일제의 국권침탈 야욕이 거세지자 이에 맞서 독립협회의 주도회원으로 활약했다.

이런 가운데 1907년 1월부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지난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광제(金光濟·1866~1920)

석람 김광제는 충남 보령군 웅천면 평리에서 태어났다. 1888년(고종 25년), 병조 효력부위에 제수돼, 통훈대부 훈련원 검정의 관직을 지냈다. 1902년(광무6년) 10월엔 정 3품 통정대부를 거쳐 호남시찰사 및 동래경무관을 지냈다.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경성의 경찰치안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왕궁에 대해서마저 일본군이 경비를 맡게 되자, 경무관이던 김광제는 이에 격분해 사표를 냈다. 그리고 그 해 12월, 고종황제 앞으로 친일배와 내정부패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조정의 미움을 사 고군산도로 유배까지 갔다.

1907년초 대구로 온 그는 광문사라는 인쇄소겸 출판사를 건립, 출판을 통해 한국 민족에게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고 계몽시키려는 노력을 폈다. 그리고 서상돈 등과 함께 국채보상회(國債報償會)를 조직, 전국민이 3개월간 금연(禁煙)한 돈으로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일본에서 빌려온 1천300만 원을 갚아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자는 운동을 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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