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 책을 읽는다)네 정신에 새로운 창을 열어라

작업실 이사를 하면서 속필로 적힌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당신은 울부짖을 겁니다."로 시작하고 있다. 기억은 곧장 소급됐다. 일본 여행을 마치고 화실로 복귀해 벽에 붙여 놓았던, 그리하여 때가 낀 마음을 비워 내던 글, 그 쪽지의 문장이 실린 책을 다시 집어 들어 연유를 쫓아 갔다. 책등은 닳았고, 꼼꼼한 냄새가 낀 책장 사이에는 낙서와 그림들, 그리고 간단한 일본말들이 한글로 적혀 있다.

묵직한 하드커버, 두텁하게 제본된 큰 판형이 마치 잘 편집된 아트 북 같다. 책은 서른 꼭지로 나눠 있으며 살아 있는 날의 엄살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것도 작가라면 더욱 오롯한 각성과 더욱 명쾌한 해독을 추궁한다. 미술 문학은 물론 음악, 철학, 건축과 같은 전통적 장르뿐 아니라 영화, 패션, 사진,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같은 과도한 컨템포러리까지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바람구두를 신은 사내, 시인 랭보와 앙상한 너머의 세계 자코메티와 거리의 설움 김수영에 이르기까지 키스헤링, 카프카 등 30인의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각기 다른 필자들은 세상에 침을 뱉는 그들의 실존을 언급, 창조자들의 궤적을 오만한 필체로 경배하라고 서술한다.

"당신은 분명 울부짖을 겁니다/ 당신의 조그만 세계가 당신을 놔 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홍역 걸린 볼품없는 세계에 누가 있나요/ 당신은 금으로 만들어져 있는데도/ 사람들이 당신을 사주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려고요?/ 그래서 경험해 보았나요?"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의 'Are You Experienced?'의 노랫말이다.

이 책을 배낭에 찔러 넣고 여행지를 배회하던 때가 몇 해 전 겨울이었다. 혹한의 추위가 육신을 추근거려도 추위가 더없이 미덥게 느껴지던 때, 그때는 그랬다. 사소한 것들이 사소하게 나를 옭죄어 가던 시기, 온전한 해를 따라가다 그림자의 잔량을 보면 니힐은 오후의 섬뜩함으로 왔다. 그리고 떠나지 않는다. 무슨 질병 같다. 마침내 여행자는 고독하다. 그러나 이 세상의 고독이 눈물로 해소될 수 없음도 그때 알았다. 밤이 되면 지쳐 은밀한 몽상에 잡혀 책을 펼친다. 너덜너덜한 노트 위에 초록한다.

비주얼 이미지와 텍스트를 따라간다. 자간과 행간 사이 많은 욕망과 허무가 동시에 녹는다. 혹한의 밤은 많은 것을 감추어 주었다. 하지만 정신이 깊이 증폭하고 진화해 가도, 그때는 나의 신발을 벗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다.

권기철(시인·경북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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