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는 조용히 찾아와 밤새 세상을 적셔놓았다. 젖은 도로를 달리는 차바퀴의 마찰음은 바위 기슭으로 밀려오는 파도소리 같다. 창문을 여니 아직 조금 춥지만 온몸에 쏴하게 스미는 공기는 봄비의 살결이다. 이 손님을 어찌 집 안에서만 맞으리.
나는 살금살금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비릿한 비 냄새가 가슴에 스민다. 원래는 비에 젖은 흙 냄새라고 하는데 비 냄새라는 어휘가 더 좋다. 천천히 걸어본다. 떠도는 물기가 깃털처럼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화단 곳곳에 감로수를 마신 냉이꽃, 제비꽃, 광대나물이 벌써 꼼지락꼼지락 피었다. 고개들어 보니 목련도 가지마다 소복소복하다.
봄비는 한 해를 기다려 만날 수 있는 손님이며 반가운 선물이다. 이 신선한 선물은 또 한 해를 무사히 보내야 받을 수 있다. 시간은 좌충우돌 흘러갈 뿐 '무사함'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내년에 봄이 다시 오고, 내가 또 봄비를 만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우리는 늘 가능성에 기대어 살지 않는가.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알뜰살뜰히 즐겨야 할 따름이니 어디론가 봄비 내린 아침 풍경을 적어 보내고 싶다.
나는 들고 나온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린다. 옛 애인을 떠올려본다. 안 보내느니 못하다. 늦잠 자고 있는 서방님께 보낼까? 싱겁기 짝이 없다. 해묵은 친구는? "늙어가면서 뭔 호들갑이여."할 게 뻔하다. 마땅한 주소가 없구나. 이맘때 잘 어울리는 김남조 님의 시 제목이 떠오른다.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아무래도 오늘 종일 나는 봄비의 식민지가 될 것 같다.
사윤수(대구시 북구 대현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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