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어느 노인의 편지

차츰 노인인구가 많아지면서,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우리에겐 근심도 그만큼 많아졌다. 노인을 모시고 섬기는 일 자체를 힘겨워하는 단체나 가정들도 더 많아졌다. 끝까지 사랑과 정성을 다하려는 우리의 노력에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때로 생각 없이 던지는 냉정하고 무자비한 말로써 '오래 사는' 이 땅의 노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심한 건망증으로 종종 정신없는 행동을 하더라도 완전한 치매환자는 아닌 노인에게 존경은커녕 인격을 비하시키는 막말을 할 적엔 얼마나 서운할까? 더구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딸들의 입을 통해서 그런 말을 들을 땐 겉으론 내색도 못하고 아마 속으로만 울 것이다.

안 그래도 '오래 살아' 미안하고 눈치가 보이는 그에게 은근히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듯한 말이 들려올 땐 얼마나 비참한 심정이 될까. 어느 날 이분들의 입장이 되어 시를 적어보았기에 소개하려 한다. 늙음 자체만으로도 힘겹고 고독한 싸움을 계속 해야하는 노인들을 향한 우리의 맘씨와 말씨가 좀 더 유순하고 친절해 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딸들/ 그리고 나를 돌보아주는/ 친절한 친구들이시어

나를 마다 않고 살펴주는 그 정성/ 나는 늘 고맙게 생각해요

허지만 그대들이 나를/ 자꾸만 치매노인 취급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교육시키려 할 적마다

마음 한구석에선/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그냥 조금 기억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없어진 것뿐인데-/하고 속 으로 중얼거려 본다오

제발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나를 갓난 아기 취급하는/ 언행은 좀 안 했으면 합니다

아직은 귀가 밝아 다 듣고 있는데/ 공적으로 망신을 줄 적엔/ 정말 울고 싶답니다

그리고 물론/ 악의없는 질문임을 나도 알지만/ 생에 대한 집착이 있는지 없는지

은근 슬쩍 떠보는 듯한 그런 질문은/ 되도록이면 삼가 주면 좋겠구려

어려운 시험을 당하는 것 같아/ 내 맘이 편칠 않으니-

어차피 때가 되면/ 생을 마감하고 떠나 갈 나에게

떠날 준비는 되어있느냐/ 아직도 살고 싶으냐

빙빙 돌려 물어 본다면/ 내가 무어라고 답을 하면 좋을지?

더 살고 싶다고 하면/ 욕심 많은 늙은이라 할테고

어서 죽고 싶다면/ 우울하고 궁상맞은 푸념쟁이라 할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의 숨은 비애를/ 살짝 감추고 사는 지혜가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여/ 내가 가끔은 그대들이 원치 않는

이기적인 추한 모습/ 생에 집착하는 모습 보일지라도/ 조금은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지요

하늘이 준/ 복과 수를 다 누리라 축원하고/ 오래 살라 덕담하면

좋다고 고맙다고/ 겉으로는 웃으며 대답하지만/ 속으로는 나도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평온한 죽음을 맞게 해 달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 달라고/ 오늘은 내 입으로/ 꼭 한 번 말하고 싶었다오

그러니 부디 지상에서의/ 나의 떠남을 너무 재촉하지는 말고/ 좀 더 기다려 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나를 짐이 아닌 축복으로/ 여겨 달란 말은 강조하지 않을테니

모든 것을 시간 속의 섭리에 맡겨 두고/ 조금 더 인내해 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빚진/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는 뜻으로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어설픈 편지라도 쑬 수 있으니/ 쓸쓸한 중에도 행복하네요

어쨌든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내 처지에/ 오늘도 미안한 마음 감출 수가 없지만

아직은 이렇게 살아있음이/ 그래도 행복해서/ 가만히 혼자 웃어봅니다

이 웃음을 또/ 치매? 라고 하진 않을지 걱정되지만 그래도 살짝 웃어봅니다'.

이해인(수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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