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청통면 계포리에 있는 청하사에 가면 여느 사찰엔 없는 건물이 눈에 띈다. 딱히 사찰의 전각은 아닌 듯 한 데 현관엔 차를 구걸한다는 의미의'다걸소(茶乞所)'라는 당호가 시선을 끌어잡는 이곳은 청하사 주지 법심(法心·63)스님이 차를 마시며 일상의 수행처로 삼는 곳이다.
"잘 우려낸 찻물이 담긴 작은 찻잔을 두 손에 감싸 듯 쥔 채 살포시 단전 가까이 올려놓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마시려는 찰나의 마음은 참선에 들었을 때의 그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선 수행과 차 마심을 동일선상에 두는 선다일여(禪茶一如)를 말함 이련가. 차를 내미는 스님의 뒤로 벽면을 둘러가며 차사발이 빼곡하다. 아랫단에는 형형색색의 다기들이 창틈으로 새어든 햇살에 반사돼 빛을 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꽤 넓은 다걸소 안 벽면이 온통 차사발 선반이다. 언뜻 봐도 하나같이 명품의 품격을 띤다.
"한 30년 차를 마시면서 이상하리 만큼 다완(茶碗), 즉 차사발에 마음이 이끌리게 됐어요."
법심 스님이 마음 내키는 대로 전국의 유명 도요지를 찾아가며 하나 둘씩 모은 차사발은 10여종 1천여점, 다구가 120여종에 이른다.
"다구는 쓰기에 편리하면 그만이죠. 잔과 다관·숙우·퇴수기로 차를 데우고 우려내는 다반사(茶飯事)를 펼치는 데는 기능성이 우선됩니다. 하지만 차사발에는 미학이 설정돼 있습니다."
스님이 스스로를'차사발에 미친 중'이라고 칭하는 이유이다. 일본인들이 국보로 떠받들고 있는 기자에몬(풍신수길이 사용했던 찻잔)이나 이도다완도 차사발 아래 부위의 굽이 높은 정호자완(井戶磁碗)류로 우리나라의 막사발이 그 원류다.
막사발은 굽 안 볼록한 부위인 하늘(乾), 오목한 부위인 땅(坤)과 더불어 굽의 높이를 일컫는 죽절(竹節), 굽과 사발의 둥근면이 만나는 지점에 생긴 매화피(흘러내린 유약의 방울) 등이 어울려 미학의 정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기에 사발 바깥면의 곡선미와 도공의 손자국이 남아 있는 물레선, 약 1천200도가 넘는 가마 속에서 장작불의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그릇 표면의 미묘한 색감의 변화 등이 자연스럽게 그릇의 미학을 결정짓는다.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마음에 드는 차사발이 있어 찬찬히 뜯어보다가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박물관과 서적을 뒤적였는데 좋은 그릇은 죄다 일본에 있대요."이때부터 법심 스님은 괜스레 일본에 대한 반발심이 생기면서 차사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걸소 안에 진열된 다기며 차사발 중 어느 것 하나 스님이 한 번 이상 사용하지 않은 것이 없다. 좋은 차사발은 쥐면 손에 딱 들어오는 느낌이 든단다.
스님 지론에 따르면 명기(名器)는 누가 어떻게 쓰냐에 달려 있다. 도공은 그저 좋은 그릇을 빚을 뿐이다. 이 같은 바람이 있어 스님은 차사발마다 불원성(彿願成), 만다라(曼多羅), 다신성(茶神聖)이니 이름을 적어놓았다.
뜨거운 찻물 탓에 유약에 균열도 생기고 손때가 묻기도 하면서, 마치 원석을 깎아 찬란한 보석을 만들 듯이 그렇게 스님은 차사발을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차사발도 이제는 형태나 종류면에서 일본의 것과 차별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고유의 모델이 생산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도공들의 창작력도 요구됩니다. 그래서 막사발이 세계적인 브랜드로 거듭 날 필요가 있는 거죠."
스님이 그 동안 차사발을 수집해온 속뜻이기도 하다. 하늘처럼 원만하고 땅처럼 넉넉하며 죽절처럼 기상이 날리며 매화피처럼 자연스러움을 갖추면서도 불의 조화로 투박하면서 정감 넘치는 그런 막사발을 말이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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